중국에서 온 편지 작가정신 소설향 23
장정일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선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내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 혹은 ‘하이퍼링크’ 방식으로 이름 붙여 놓은 방법이 있다. 책을 읽다가 꼭 보고 싶은 책이 눈에 띄거나 저자가 소개를 하면 그 책으로 갈아타는 방식이다. 영역과 장르를 넘나들며 읽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같은 분야에서 다양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주변에서 얻어지는 책에 대한 정보들이다. 한겨레 서평이나 추천 목록을 참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전자보다 위험하다. 출판사의 뛰어난 마케팅 능력이나 주례비평의 낚시 바늘에 걸려들기 십상이고 특히 검증되지 않은 신간에 대한 불안감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장정일의 <중국에서 온 편지>는 첫 번째 방법으로 선택한 책이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에서 저자가 적극 추천했던 두 권 중의 하나다. 나머지 한 권도 읽고 있다. 탁선생이 추천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시선과 관점을 위해서다. 소설은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된다.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시점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고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3류 쓰레기 통속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김유정의 동백꽃의 서술자가 점순이였다면 사춘기 시골 소녀의 일기장이 되어버린다. 고정된 관점과 시선은 얼마나 위험한가.

  중국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진나라의 시조 진시황에게는 스무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 가장 출중하고 명석했던 큰 아들 부소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를 토대로 장정일은 다양한 문헌을 뒤적이며 역사의 ‘구멍’을 찾아냈다. 그 구멍은 호기심의 블랙홀처럼 모든 상상력과 추측을 빨아들이는 대신 어둠속에서 선명한 한 줄기 빛을 내뿜는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아있을 역사속의 인물을 되살려내는 전지전능하신 작가는 타당한 이유를 독자에게 설명해야 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분명히 이 글은 소설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부소이자 부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면이라고 선언하는 서술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을 따지거나 소설의 잣대를 거부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형식의 이야기든 아주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또 한가지 이 책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주 훌륭한 소설이다. 개연성 있는 ‘허구’가 아니라 ‘진실’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찌됐든 독자의 오감을 충분히 만족시킬만한 책을 뒤늦게나마 만나서 다행이다.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소가 아버지 진시황의 견제를 받아 만리장성까지의 먼 길을 떠나야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도 희미하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소가 떠난 지명조차 밝혀놓지 않았으나 작가의 구라는 들어줄만 하다. 변방의 만리장성을 쌓아가며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천하통일의 일등 공신이었던 몽염에게 보내 희생양으로 삼는 전략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눈이 멀어 몽염에게 도착한 부소는 극진한 치료와 대접을 받고 다시 시력을 회복하며 몽염과 사랑에 빠진다.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몽염에게로 옮아갔다고 볼 수 있다.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부소는 아버지와 죽음을 통해 이세 황제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허망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제목처럼 편지의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끝없이 떠벌이는 형식은 단 한 번의 휴지기 없이 한 호흡으로 길게 하소연한다. 말없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아버지와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는 아들 부소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1인칭 서술자의 끊임없는 언변에 혀를 내두르도록 만들어버린 역사적 상황과 틈새에 있지 않다. 중요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이 소설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기본 토대라면 아버지와 비교를 통해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삶의 진정성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항변으로 들린다.

  진시황의 무덤에서 출토된 실물크기의 병마용들을 전시했던 코엑스 전시회에 다녀왔던 적이 있다. 그 엄청난 규모와 부장품에 놀란 것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한 인간의 욕망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절대 권력에 오른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이 역사를 이렇게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싶다. 부소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지껄이고 있지만 이 책은 어쩌?아버지 진시황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토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역사적 인물을 살려내서 진시황에 대해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이 들었다.

  가정법이 통용되지 않는 역사를 뒤집어보는 일은 철지난 노래를 부르는 가수와 같을까? 우리의 관심은 확인되지 않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호기심일 것이다. 기록된 역사의 구멍과 간극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상상력이 소설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자유롭게 지껄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만은 사실 아닌가?


060117-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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