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네그리와 토니 네그리는 다른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네그리 자신이다. 사회적 가면과 본질적 자아 사이의 충돌은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상황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그리를 persona와 anima의 대립과 갈등으로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행간에 녹아 있는 네그리의 내적 갈등과 고민의 깊이에 공감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처음 만난 안토니오 네그리는 안토니오 그람시와 닮았다. 20세 초 파시즘이 극에 달할 무렵 이탈리아 공산당을 이끌었던 그람시의 생애와 사상이 안토니오 네그리를 통해 20세기 후반으로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치열한 삶에 대한 대가는 이기적 욕망과 거리가 멀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사회적 욕망의 확대라고 해석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집과 독선과 구별하기 위한 사회적 삶은 때때로 숭고하게 느껴진다. 옥중에서 사망한 그람시와 이제 겨우 자유의 몸이 된 네그리는 이탈리아라는 공통된 조국을 배경으로 시대를 달리하는 숭고한 힘으로 느껴진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안경너머의 네그리의 눈빛은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입가에 머문 미소는 의미 심장해 보인다. 갑자기 왠 관상인가. 이 책은 네그리를 읽기 위한 전채 요리쯤 되겠다. 네그리 스스로가 말하는 생애와 사상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대담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느 뒤푸르망텔과의 대화를 통해 네그리를 읽을 수 있다. 막연한 주제와 인터뷰 형식이 아니라 알파벳 A(무기arme, 습격attentat, 미래avenir…)부터 Z(엘레아의 제논zenon d''Elee)까지 분명한 어휘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자유스러우면서 선명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네그리의 가장 큰 장점은 이탈리아 투쟁의 선봉에 선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체계적인 생각들이다. 폭좇?철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이론과 실천의 조화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편견과 좁은 시야로 오로지 한가지 목적에 매달리는 맹목성도 아니고 통합주의를 주장하는 위험한 줄타기도 아니다.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이론과 실천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점이 있다. 좀 더 읽고 파악해야 할 부분으로 남겨진다. 행동하고 투쟁하는 것이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는 ‘진보’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과격한 ‘혁명’이나 온건한 ‘개혁’이냐의 문제는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회적 갈등이다. 우리의 문제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갈등과 모순들은 해법이 다르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니 처방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모두가 동의하는 대안이 불가능하겠지만 네그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진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진영을 선택하는 것에서 벗어난 진리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과학이 중립적이라고 주장할 때, 사람들은 과학이 무력하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삶이 중립적이라고 주장할 때, 사람들은 삶이 무기력하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전투적 태도, 그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즐거움과 삶의 쾌락에 접근할 수 있는 형식입니다. 전투적 태도는 충만한 열정에 일치하는 언어적 장을 발전시키고, 삶의 살을 특이한 신체로 변형시킵니다. - P. 57 진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전언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현실에서 진영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진리는 각기 다른 형상을 하게 된다. 진리 이전의 문제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전투적 태도’야 말로 네그리 사상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선택과 갈등은 삶의 한 양상이니 그리고 전투적 태도와 투쟁이야말로 삶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도구이자 분명한 방편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안토니오 그람시와 닮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바로 세계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를 발명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혁명하는 것입니다. - P. 240060218-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