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의 세계 -상 -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소통했는가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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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현재를 확인하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흔히들 ‘세계 속의 한국’이 갖는 의미와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연하게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단순한 작업 중에 하나가 ‘역사’에 대한 재평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하나의 통일된 관점이나 기준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새로운 견해와 다른 각도에서 서술되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사관에 따라 잘못 씌어진 역사에 의해 우리들 머릿속에 심어진 우리 역사에 대한 편견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활발한 토론과 자기 학습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제도와 시스템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맹목적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현실에서 ‘역사’ 교육은 특히 그러하다. 일단 주입된 사관은 스스로 깨치고 확인하기 전에는 고스란히 하나의 집단 무의식으로 고착된다.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단일 민족이란 무엇인가? 혈연의 단일성을 쉽게 떠올리지만 저자의 말대로 우리나라 275개 성씨 중 136개가 귀화 성씨라는 사실은 ‘한핏줄’을 무색케 한다. 한 나라의 민족의식은 역사를 통해 확인되며 혈연 공동체를 넘어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역사 공동체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개인을 넘어선 민족은 의미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타 민족이나 국가와의 비교 우위에 서고 싶어하는 우생학적, 역사적 우월감은 그 근본 뿌리부터 현재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전 세계에 대한 편견과 아집으로 고정될 우려가 있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섣불리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매몰되는 일처럼 두려운 일은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확인되듯이 위정자들은 민족과 국가를 내세워 ‘개인’을 희생하도록 강요해 왔다. 그 민족과 국가는 일부 특권층과 권력층의 직권남용과 공인된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가면으로 민중들을 현혹시켜왔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의 역할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위험성에 대한 수많은 역사적 교훈과 경험들은 우리를 소심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다양한 이념들이 가진 의미를 확인하는 일은 미시사를 연구하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민족과 역사를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세계 속의 한국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선행한다.

  ‘한국 속의 세계’라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분명하다. 이 책은 냄비처럼 들끓었던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한겨레 신문사에서 기획한 대국민 홍보용 내지 우리 역사 바로 알기 혹은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자긍심과 우월감 고취하기의 일환으로 연재됐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서술과 사실 확인 차원에서 냉정하고 정확하며 꼼꼼한 고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다. 통시적 관점을 넘어서 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야 옷감을 짤 수 있듯이 단선적인 역사 서술이 1차원라면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2차원적 관점은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하며 세계사와 맞물려 납득할 만한 구체적 사실들을 확인하게 된다.

  ‘국사’와 ‘세계사’를 구분하지 말고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과정에서부터 이런 작업이나 노력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고조선에서 조선까지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고립된 역사가 아니다. 외침과 방어 생존과 독립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는 처절한 고통의 역사로만 여겨진다. 내가 받은 역사 교육은 그렇다. 그러면서 끝까지 잘 버티고 용케 살아남았다는 느낌으로 끝이었다.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의 연속된 흐름을 가지기 위해 그렇게 서술되거나 가르칠 수밖에 없는 문제인지 고민해 볼 일이다.

  저자가 고민했던 부분은 기준은 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문명교류사’로서의 한국 역사다. 짤막한 연재물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깊이있게 다루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역사적 흐름이나 연속선상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한 책에서 모든 것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지닌 소설처럼 작은 단편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 각개 전투하는 방식이다. 몰랐던 사실을 아는 즐거움과 우리 역사에 대한 닫힌 관점을 열린 관점으로 전환하는데 일정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왜곡 부분과 일본의 임나일본부, 칠지도에 대한 저자의 격한 목소리는 다소 감정적인 면이 드러나지만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의분이라고 본다. 냉정함과 객관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정도라면 단점이라기보다 책을 읽는 재미로 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의 견해에 대한 적절한 비판적 안목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타임즈』에 조선의 “양반들은 개혁을 부패나 직권남용 같은 자신들의 공인된 권리의 상실”로,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빼앗아가는 악”으로 간주한다(1897. 9. 17)는 이야기가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으로 각인된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기적 민족주의나 국가 우월주의의 위험성을 걷어 낸다면 우리 민족과 국가도 ‘관계’ 속에 발생하고 성장해 왔다는 역사에 대한 당연한 인식이 필요한 책이다. 서로 다른 문명들의 삼투압 작용을 배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따로 또 같이’ 살아온 인류에 대한 확인 작업이 단편적이지만 분명한 의미를 지닌 책이다.


060225-029(상), 030(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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