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휘트먼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 P. 249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여학생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직접 책을 읽는 일보다 즐거울 때가 있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재미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렇게 책을 읽던 그 많은 사람들은 책 때문에 인생이 달라졌을까? 휘트먼의 말처럼 우리의 임무는 책이 아니라 세상을 읽는 것이다. 다만 책은 세상을 비춰보는 프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한 사람의 내일이 암울해지고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고 할 수는 없다. 단순히 ‘독서’ 행위 자체가 갖는 사회적 의미는 크지 않다. 다만 책이라는 형태의 지식 전달 수단이 없었다면 현재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제 책은 너무 크고, 노력과 부피에 견줄 때 상당히 비효율적인 저장 매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책을 읽게 되었을까?

이 단순하지만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에 담겨 있다. 이 책은 ‘역사’라는 형식에 대해 갖기 쉬운 선입견들이 없이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에 우선 마음에 든다. 연대기 순으로 혹은 시대별로 책이나 독서와 관련된 정보들을 나열했다면 오히려 지루했을 법한 이야기들을 저자는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먼저 <독서의 역사>는 역사책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역사는 ‘독서’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독서가’의 역사다. 책을 읽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역사책이라서 흥미롭다. 진흙 서판에서 비롯된 책의 역사나 여러 나라의 책의 기원들을 들추지 않고 책을 읽는 ‘행위자’를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 형식의 글들이 훨씬 더 흥미롭고 설득력을 가진다. 그렇다고 내용 자체가 단순하고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읽는 사람들이 가려 읽고 부분들을 조합해서 읽어도 얼마든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독서에 관한 역사책이다. 어느 대목을 읽어도 독립적으로 독서가에 관한 즐거운 소품이 되지만 부분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룰 때는 한 권의 역사책이 되는 보기 드문 책이다. 어떤 역사든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자료와 증거들을 들이밀며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채도 필요하겠지만 그저 차 한 잔의 여유와 더불어 산책을 떠나듯이 저자의 안내에 몸을 맡겨 보고 싶은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독서의 역사>는 책을 좋아하는 ‘독서가’들의 필독서라고 해도 좋을 만하다.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자 종착지가 바로 책은 아닐까? 진흙 서판에서 이제는 LCD 모니터까지 책을 읽는 형태와 방법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달라졌다. e-book이 등장하면서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종이책의 형태마저 달라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책에 대한 개념과 정의도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책이 갖는 의미와 역할까지도 한번 쯤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 바로 <독서의 역사>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책에 대한 지독한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6000년간 지속되어온 인류의 책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저자는 시대를 대표하는 독서가를 통해서 혹은 번역가나 검열관, 책 수집가들을 등장 시키며 독서의 역사를 풍요롭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이 다른 역사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이자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행복해지는 방법만큼 행복의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가장 적은 비용과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최대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이 있겠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행복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알베르토 망구엘이 더듬었던 ‘독서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책에 미친 사람들과도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그것이 책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15세기 초에 "나는 어디에서든 행복을 추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그마한 책과 함께하는 좁은 구석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 P. 223


06082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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