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손목에 수갑을 찬 숀 펜과 그 옆에서 발자국 소리만 공포스럽게 울려퍼지는 긴 복도를 함께 걷던 수잔 서랜든의 표정이 사진처럼 선명하다. 영화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개인적으로 1년에 50편 이상을 봐야 직성이 풀렸던 암중 모색기였고 영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던 무렵이었다. 아마 숀 펜이라는 미국 배우의 연기를 주목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고, 그 영화를 만든 팀 로빈스는 <쇼생크 탈출>의 주연으로 강한 인상을 받았기때문에 더욱 호감을 가지고 봤었는지 모르겠다.


  소설 장르의 의미는 독자 반응 중심 비평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기 이전부터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다. 그런 논의에 이제 난 별로 관심이 없다. 주관적일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내 안에서 결정되는 이기적 소화방식 때문인지 모르겠다. 편견과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책읽기나 문학에 대한 역할론을 한마디로 결론 내렸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소설은 그저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영혼의 울림을 전해준다. 그 울림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 모두의 행동이 되고 현실이 되기도 한다.
 
  빅토르 위고와 알베르 까뮈의 소설로 촉발된 사형제 폐지 논의는 프랑스에서 1980년이 되어서야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종지부를 찍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민감한 문제를 문학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공지영의 소설은 놀랍다. 그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과 실패 가능성을 전제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소설은 내게 늘 불편했다. 아니, 모든 소설은 늘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녀의 소설은 ‘특히’라고 말해야 옳겠다. 이유는 그녀의 말하기 방식이다. ‘울림’이 있는 말하기 방식이다. 감성을 자극하거나 행간을 건너뛰는 긴장과 유려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신경숙이나 은희경, 전경린이 앞선다. 내용이 문체를 결정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덮어두고 싶거나 외면하거나 애써 눈돌리지 않는 거적들을 걷어 올리며 냄새를 풍기고 조용한 비명으로 시선을 끈다. 그래서 불편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공지영의 소설에 따라붙는 쓸데 없는 수식들은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편견일 수 있다. 공통분모나 같은 분위기를 털어내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던 평가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 그 논의는 일단락 되었다.

  새로움은 변화를 의미하고 변화는 작가에게 필연이다. 자연법과 사회계약설로 논거를 삼아 사형제 존치와 폐지론은 우리 사회에서도 지속적인 화제가 되어왔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문학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공지영의 다음 소설을 기다리게 하는 힘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소설속 주인공 정윤수와 문유정은 극단적 대립항으로 등장한다. 그들이 공유하거나 서로의 상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녀의 소설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경험 -그것이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을 공유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거나 무게 중심이 상당부분 이동되었다면 끔찍했을 것이다.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 세 번이나 자살에 실패한 문유정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형수 정윤수의 모습은 객관적일 수 없고 그것이 이 소설의 진실이다.

  “행위는 사실일 뿐. 진실은 늘 그 행위 이전에 들어 있는 거라는 거, 그래서 우리가 혹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거……” 나는 이 한마디로 이 소설을 읽었다. 개별적 상황과 사건들에 해당될 수 있는, 문학의 역할과 본령을 토해내듯 하는 문유정의 처절한 외침이다. 이것은 우리들 삶에 대한 참담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외면해버리고 싶은 삶의 진실들을 바로 보거나 “몰랐다”는 말 한마디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의 진정성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소설의 형식 또한 조금 색다르다. ‘블루 노트’는 정윤수의 유서 형식으로 죽는 순간 그의 진실이 되는데 이 노트는 시간상 소설이 끝나면서 시작되지만 소설의 처음부터 문유정의 시각과 교차되어 소설이 끝나면서 마지막 장을 보여준다. 각 장마다 예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 짧지만 강한 여운이 남는 글들은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한참 들여다 보게 한다.

  좋은 책과 나쁜 책,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구별하라면 모?사람들의 기준이 다를 수 있으리라. 다만 그 기준의 공통분모는 ‘삶의 진실, 대리경험을 통한 생의 진정성’이 아닐까 싶다. 누가 감히 소설을 가지고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줄 것이며, 인생이 무엇이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마는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 높여, 때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가 아닌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200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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