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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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얼음이 얼듯 수련은 누웠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골똘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바퀴가 물 위를 굴러가네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긴 여운과 촉촉한 울림은 오래동안 계속된다. 메아리처럼 울렁거리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온 듯 깊은 숨을 쉬어도 쉽게 떨쳐지지 않는 이 느낌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바로 그 서정시의 본령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 먼 길을 돌아가는 방법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 이성과 감성의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시인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말의 탄탄함과 아름다움을 살려낼 수 있는 힘과 부드러움을 문태준은 모두 지니고 있다.

수직과 수평의 충돌이 아니라 있지만 없는 것같은 수면의 바퀴를 찾아내는 눈과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재미>이다. 쉽게 한번 읽고 버려지는 시집이 아니라 두 손을 적셔도 좋을만큼 한참이나 두고두고 읽을 만하다. 좋은 시는 울림이 깊은 시다. 울림은 가슴을 적시거나 이성에 메아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문태준의 시는 우선 시집을 들고 있는 두 손부터 적셔준다. 땅속에서 뿌리부터 적셔주는 시인의 말은 발바닥에서 위로 삼투압 작용처럼 머리끝까지 수분을 공급해 준다.

풍경처럼 펼쳐진 그의 시들 속에 작은 움직임이나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늘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나와 사물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얽힌 시선들을 내가 풀어주고 있는 느낌이다.

벌레詩社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먹던 나에게
작은 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왕왕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亭子모임처럼 그럴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詩社라 불러 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 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 일
꽃과 잎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 올 한 올 다 끄집어내면 환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나와 벌레의 관계가 아니라 벌레와 밭 사이에 끼어든 내가 오히려 낯설지만 ‘꽃과 잎과 문장’들은 이미 하나가 되어 버렸다. 시인과 자연의 동일시를 기본적인 규칙으로 삼는 서정시에 또다른 손님이 개입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독자들이 새로운 서정시를 만났다고 여기기는 힘들지만 분명 낯선 이미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하다.

나이와 상관없이 생의 감각과 느낌을 적어두는 습관과 연습은 시인의 생활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 ‘얻어온 것들’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문태준의 언어는 모국어에서 빌어온 최고의 성찬이다.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이고 ‘사랑’도 다 옛일이 되어 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계절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 삶에 바닥은 언제고 드러난다. 그 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다. 언제나 준비된 바닥이 되고 싶다. 항상 바닥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닥을 두렵지 않은 생이고 싶다.

여기가 바닥이다. 더 이상 없는가.

내가 돌아설 때

내가 당신에게서 돌아설 때가 있었으니

무논에 들어가 걸음을 옮기며 되돌아보니 내 발자국 뗀 자리 몸을 부풀렸던 흙물이 느리고 느리게 수많은 어깨를 들썩이며 가라앉으며 아, 그리하여 다시 중심을 잡는 것이었다

이 무거운 속도는, 글썽임은 서로에게 사무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태준의 시에는 감정의 속도와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다. 감정을 객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형태로든 누구의 감정이든 스스로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절제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글썽임이 서로에게 사무친다고 말하는 시인에게서 감각기능을 상실한 것걋?느낌을 받는 것은 관찰자적 시선 때문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메마른 가슴 때문일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때가 오겠지만, 언제나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 수는 없다.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생의 모든 감각이 깨워지는 순간이 있다. 국어의 모든 자음과 모음이 살아 움직이듯, 그 언어들이 연주하는 음악처럼 문태준의 시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다만 담백한 이미지나 감각적인 언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충분한 마음의 여유와 모래바람처럼 메마른 감각이 살아 있다면 <가재미>는 오히려 훨씬 더 빠르게 우리를 적셔준다.

바람이 나에게

한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 맑은 날 좋았는데
오늘 바람 많은 평야에 홀로 서 있네
수많은 까마귀 떼가 땅 끝으로 십 리를 가는 하늘
나는 십 리를 가는 꿈도 잃고 나귀처럼 긴 귀를 가진 바람을 보네
다급한 목숨이 있다면 늙은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들판을 재우며 부르는 이 거칠은 바람의 노래를



09062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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