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면 따져봐 - 논리로 배우는 인권 이야기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최훈 지음 / 창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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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불편하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8살쯤으로 기억하는 어느 여름, 아버지가 쳐놓은 모기장 안에 앉아 흑백TV 화면을 바라보며 처음 그랬을지도 모른다. 익숙해질만도 한데 여전히 불편하다. 계속 불편할 것 같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불편하게 살아와서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불편한 사람들은 대응 방식은 여러 가지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나면 타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면서 그 불편함은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되고 타인의 말과 행동,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며 그 반대로 타인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보고(그것이 주변 사람이든 동시대 인물이든 역사적 인물이든 상관없이) 열등감을 하종강 선생님의 표현대로 부채감을 느끼기도 한다.

 

책 속에는 답이 없다. 다만 수많은 선언과 아포리즘만 난무할 뿐이다. 강준만은 싸가지 없는 진보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고 최훈은 장삼이사에게 불편하면 따져봐라고 충고한다. 책 머리에서 최훈은 우리 모두 따지스트가 되자고 부추긴다. ‘우리 모두 리얼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는 체 게바라의 말을 패러디 했다. 그러나 따지스트가 되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피곤한 삶인지를. 그 대상이 개인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국가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잠시 숨을 고르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따지스트가 되었을 때 벌어질 개인적 고통과 기나긴 싸움의 시간을 누가 책임지겠는가.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태도와 방법의 문제다. 웃으면서 말하면 모른 척 눙치고 넘어가고 의도와 관계를 내세우며 침묵한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만 있다면 넘어갈 수 있다는 식이거나 그때그때 사람에 따라 기준과 잣대가 달라지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책은 불편하다. 너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편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저자는 우리 모두 따지스트가 되자고 할 수 있을까. 사는 게 불편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많은 이유 중에 하나가 책 때문이다. 책 속에서는 불편한 진실이 많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논리로 배우는 인권 이야기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라고 충동질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어쩌면 악마의 유혹이다. 침묵하는 다수, 이해(利害) 계산, 사회적 관계, 성공의 욕망 등 세상을 살다보면 논리로 따져야 하는 일보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따져야하는 순간이 더 많지 않은가.

 

완전한 세상은 없다. 완벽한 조직도 사람도 물론 없다. 그러나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기준과 조직은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작은 모임도 커다란 공동체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김두식이 불편해도 괜찮아라고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말해버리면 간단할까. 아니다, 여전히 불편할 것이다. 선택은 스스로 할 일이다. 눈을 감고 혼자만 편하게 살든가. 눈을 뜨고 불편함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따지스트가 되든가. 물론 알면서도 눈을 감는 게 아니라 그것이 틀린 일인 줄도 모르고 따질 일인지도 모르는 눈뜬 장님으로 살고 싶다면 얼른 책장을 덮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감성 에세이나 애절한 소설을 펼칠 일이다.

 

인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 유무, 나이, 학번을 묻지 않는 것이 인권의 시작이다. 고향과 졸업한 학교를 묻는 것도 실례다. 오지랖은 관심이 아니라 무례함이다.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은 사실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니라 교육부가 국정교과서로 채택해야 하면 좋겠다. 역사와 도덕을 감히 국민에게 가르치려 들지 말고.

 

모든 인간은 원래 자유롭게 살았다. 박홍규 선생님의 책 때문에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성향이 그곳에 닿아있었음을 확인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문학동네의 우리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일곱 번째로 나온 자유란 무엇인가는 자유의 A부터 Z까지 훑고 있다. 수많은 자유론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듯하다. 정치적, 법적인 자유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자유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내가 오늘을 사는 이유, 내일의 희망, 인생의 목적과 방법까지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오로지 의 힘만으로 가능할까. 타인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나의 자유를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자유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84)라는 선언이 새삼스럽다. 미뤄둘 수 없는 가치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앎은 실천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며 내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이다. 그것을 어떻게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무엇을 알고 싶은가. 그리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 책장을 덮고 걷고 싶다. 저 창밖의 어둠 속으로 지구 끝까지. 이제, 니 차례다.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 밀려날 때 저 밑바닥으로부터 번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어둠으로 몰려갈 때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말한다.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으로 살아남아 오래전 그 해변을 걷고 있다. 누군가의 손이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테고. 누군가의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렸을 테고. 누군가의 눈이 누군가의 눈을 지웠을 테고. 누군가의 말이 누군가의 말을 뒤덮을 테고. 노을은 우리의 뒤쪽에서부터 서서히 몰려왔고. 서서히 물들였고. 서서히 물러났고.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보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마치 죽어가는 사람처럼.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진창에 빠지는 기분으로.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점점 더 물러나는 기분으로. 그때에도. 이미. 벌써. 여전히. 아직도.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라고 믿는 마음이 있었을 테고. 순도 높은 목소리 사이사이로 몇 줄의 음이 차례차례로 울렸을 테고. 뒤가 없는 듯한. 이미 뒤가 되어버린 듯한. 어떤 나지막한 목소리 사이사이로. 어떤 풍경이. 어떤 얼굴이. 어떤 기억이. 어떤 울음이. 점점이 들렸을 테고. 귀신에 들리듯. 바람에 날리듯.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듣고 있다고.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 사라지는 이 순간만이 오직 아름답다고.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 사라질 때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 밤은 밤으로 다시 건너가고 있는데.

하루는 다시 기울고 있는데.

 

-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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