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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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일어나는 뜻밖의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며, 운명이란 주어진 운명에서 도망치려 할 때 바로 그 도망침을 통해 실현된다. 때로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도망치려 했던 사람으로서, 이 소설이 끝을 맺어 기쁘다.

 

라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독자들을 상상해 본다. ‘(,욕망)’(, 규범)’로 자신을 드러낸 김두식이나 우연과 필연 사이의 알 수 없는 인생의 간극을 드러내려는 은희경이나 그들이 말하려는 것은 인생이 아닌가.

 

모든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스며 우리의 인생이 진행되기 때문에 그 불안과 혼란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에 대해 환멸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은희경의 장편소설 태연한 인생의 가제본을 단숨에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때문인지 몰라도 소설가 요셉이 몸담고 있는 속물세계와 비루한 일상성 그리고 대책 없는 감상은 장삼이사들의 하루하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오래전 어느 봄날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통화중인 한 여자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시선은 운명에 회오리를 몰고 온다. 그것이 바로 아이러니한 인생의 우연이고 그 우연은 의 서사를 만든다. 소설 전체의 액자에 해당하는 이 사건은 내부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들의 시작과 끝이 아니다. 그저 와 연결되는 한 변곡점을 암시할 뿐이고 그 변곡점은 절대적인 서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역할이 아니라 계획될 수 없는 생의 이면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읽힌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을 영원으로 가정한 채 달려가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소설의 내부 이야기는 소설가를 통해 문단권력이나 상업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어떤 분야와 조직이든 유사한 문제는 있다. 다만 그것에 대한 풍자와 반어 그리고 냉소적인 문체는 이 소설이 지닌 통속성을 갈음하는 것 같아 깔끔하게 읽힌다. ‘요셉두 사람 중 누가 태연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마치 호수 표면에 우아한 백조의 발놀림처럼 누구나 그렇게 태연을 가장한 채 혼란과 불안을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과 분위기가 영화 <북촌방향>이 떠오르게 했지만 전혀 다른 곳의 시선들이 하나로 모이기도 하고 하나로 모였던 시선들은 제각각 인물들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조언과 충고를 구하는 사람도 질색이었다. 의욕적인 계획을 늘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오직 동의를 원할 뿐이다. 충고를 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희망을 기대했다. 비관이 신중함이고 냉정해야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셉의 충고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결국 시간만 아까웠다. - 19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밑줄 긋기였다.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자꾸 빨간펜을 찾게 되는 것은 공감의 다른 표현이다. 유사한 상황이었던 순간이 떠오르거나 작가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소설의 군데군데 밑줄 그은 대목만을 들여다보며 작가의 말을 대신 떠올리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세상의 끝은 S시가 아니었다. 열정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 241

 

흔해 빠진 이야기의 통속성도 문장으로 확인하고 나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은희경의 소설이 서사 위주의 재미와 첨예한 갈등으로 인한 긴장감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분위기의 술자리처럼 느슨하게 읽히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이런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 243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슬픔은 무엇일까. 독자들은 자발적인 소설의 소비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 그 나름의 이유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설을 만나는 것은 어렵다.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면서 최소한 다른 즐거움을 포기한 기회비용이 생각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 다른 즐거움들에 대한 냉소를 키웠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20610-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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