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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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자체가 메시지임을 간파한 맥루한의 말은 여전히 모든 예술에 유효하다. , 소리, 움직임, 언어 등 예술의 도구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그에 대한 반응 또한 제각각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발생한 사진과 영화는 예술 고유의 아우라를 벗어던지고 대중과 일상적으로 접속한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적확하게 짚어낸 것은 근대성의 특징일지 모른다. 동시성과 복제 가능성이 기존 예술과 배치되지만 오늘날의 예술은 규정하기조차 힘들다. 하나의 영역과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 경계 자체가 무의미해진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향유해야 하는 예술은 무엇인가.

 

가장 대중적인, 그래서 예술이라는 이름조차 어색한 영화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인가 기억조차 희미한 어느 날 새벽 독립영화관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마지막 엔딩이 올라갈 때 알았다. ‘페이크 다큐멘타리먼트(fake documentary)’라는 사실을. 그때 충격은 영화의 내용과 무관하게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그것이 사실인가 허구인가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영화조차 속임수를 쓸 때가 있다. 관객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방법이 기막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아니한가.

삶의 가장 진지한 성찰로서의 철학과 영화의 만남이 어색하지는 않다. 영화는 모든 갈래와 만날 수 있고 모든 학문과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형식이 아니라 내용의 정교함과 필연성이 문제가 되겠다. 이왕주는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를 통해 철학의 외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철학을 해석한다. 아니 영화에 나타난 철학적 질문에 해석을 시도한다. 말하자면 철학이 영화를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철학을 캐스팅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 <피아노>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는 명제를 낳고 그 명제는 에리히 프롬을 호출한다. 지구에 인구 수만큼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진부하다. 이왕주는 영화를 해설하는 대신 그 사랑의 방식을 통해 인간을 설명한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두 종류의 인간을 구분한다. 하나는 존재지향의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지향의 인간이다. 존재지향의 사람들은 단지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움, 기쁨,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길가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어떤 것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것이라야 한다. 내가 소유하고 지배하고 군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수 없는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피어 있는 꽃이 아름다우냐 아름답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 110

 

어떤 영화를 보았느냐, 재미있었느냐는 질문처럼 난감한 것이 없을 때가 있다. 재미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그 재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주 오래 전 베를린 천사의 시를 후배커플에게 추천했다가 두고두고 욕을 먹은 적이 있다. 책이든 영화든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추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좋은가. 아니 나쁜가. 추천할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 6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읽을 만하다.

 

매체의 특성상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제품 때문에 지나간 영화는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트루먼 쇼>, <굿 윌 헌팅>, <중경삼림>, <뷰티플 마인드>, <메멘토>, <일 포스티노>, <오아시스> 등 시간과 무관하게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을 다시 읽는 재미가 무엇보다 컸다. 8개의 주제로 29편의 영화를 소개하며 각각의 영화와 철학자를 엮고 있는 이 책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화에 대한 소개서로 영화를 본 사람에게는 다시보기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우연하게도 몇 편의 영화를 서너 편을 제외하고 모두 본 영화였지만 잊었던 장면,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 대사를 읽으면서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없고 오직 기억만이 있으며, 미래는 없고 다만 기대가 있을 따름이다.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 이 순간뿐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존경하고 질투하고 선택하고 거부하는 모든 것들이 이 현재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즉 삶의 시간은 오직 하나, 현재가 있을 뿐이며, 기억(과거)하고 기대(미래)하는 일들도 모두 이 시간의 지평 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재형 사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 132

 

<중경삼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한 대목이다. 기억과 기대 그리고 현존재에 대해 한 참이나 눈길이 머무는 문장이었다. ‘삶의 시간은 오직 하나, 현재 있을 뿐이라는 작가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그었다. 추억은 사람마다 다르게 적힌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지만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기억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삶이든.

 

버리고 행복하라는 비노바 바베의 말이나 유위有爲는 무위無爲를 누르지 못하고, 억지스러움은 자연스러움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노자의 말이나 지나가는 모든 것 앞에 고개 숙이게 하는 말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읽어내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나 삶의 비극성이 아니라 현재 나의 모습이 아닐까. 스크린에 투영되는 것은 멋진 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어두운 극장에 외롭게 앉아 화면을 응시하는 우리들의 얼굴이 아닐까. 철학은 영화를 캐스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영화에 철학은 까메오로 출연한다.

 

사랑은 중간에서 만나는 것이다.’ 감독 파스칼 바일 리가 영화 <좋은 걸 어떡해>에서 새롭게 보여준 사랑의 정의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정의야말로 사랑에 대한 간곡한 진실을 더 많이 담고 있지 않은가. - 354

 

12022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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