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동안
윤성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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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독자를 자신의 소설에 취하게 할 의무가 있다. 독자는 작품을 통해 한 작가를 가슴에 품게 되고 오래 기억하며 그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된다. 그것은 소설의 재미뿐만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점 등 독특한 개성에 기인한다. 여러 작품을 통해 점점 빠져들게 되는 작가도 있고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괜찮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첫 눈에 반해 버리는 작가도 있다. 처음 만나는 독자들의 가슴 속에 펼쳐지는 그 다양하고 내밀한 반응이 궁금할 때가 있다.

 

거기, 당신?으로 처음 만난 윤성희의 소설은 따뜻함이었다. 차마 긴 이야기로, 거짓 소설로 담아낼 수 없어 짧은 시의 언어가 지배했던 80년대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90년대 소설을 어떻게 떠올리고 있을까. 거대 담론의 소멸과 여성 작가들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이슈가 되었다. 미시적 관점과 내면의 문제에 대한 섬세한 관심은 여성 특유의 감각적인 문장과 1차적인 관계망을 실핏줄처럼 상세하게 그려냈다.

 

2000년이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했다고 해서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IMF라는 전대미문의 경제적 충격 이후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자유경쟁 질서의 고착은 삶의 양상과 태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문학 외적 조건들이 작품에 반영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 듯하다. 사실주의 문학이라고 볼 만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나 정도상의 모란시장 여자정도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소설은 사소하고 소소한 일에 머물며 때로는 독자들을 칙릭(chic-lit)에게 빼앗기기도 한다.

 

문학의 위기는 가리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이전에도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것은 다양한 통신 매체의 발달과 흥성거리는 볼거리와 놀거리 때문이 아니다. 중심을 잃어버리고 주변인들에 대한 위무와 개인의 슬픔과 아픔에 호소하는 일관된 방식 때문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윤성희의 소설은 거대한 흐름 바깥을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웃는 동안이 보여주는 풍경은 익숙하지 않고 현실 안팎이 뒤섞인 만화경을 연상케 한다. 가령 ‘340분이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문장에서는 건조한 모래 바람이 인다. 감정은 메말랐고 익숙한 풍경은 낯설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찾아낸다.

 

우연이란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라는 것을 첫사랑에게 배웠다고 적으리라. - '부메랑' 중에서

 

해설에서 강동호는 영원히 우연적인 것이 기적을 구원한다는 모호한 문장을 낳았지만 윤성희의 우연은 기적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기대하는 모든 희망을 조롱한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죽은 사람 혹은 유령 들은 현실 바깥에서 현실을 들여다보는 역할을 하지만 그 현실이 특별히 뒤틀리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주인공 혹은 관찰자가 이물스럽다. 그것은 정교한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집에는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감기이후에 오랜 만에 만난 그녀의 소설들은 무미건조한 물맛이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커피향처럼 은은하지도 않고 찬 냉수처럼 마시는 순간 감각을 깨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용하게 그리고 막힘없이 스민다.

 

투명 인간처럼 서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단편과 단편들 사이를 넘나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소설을 위해 탄생한 개성적 인물들이 아니다. 특별히 이 시대 밖으로 쫓겨난 소외된 이웃도 아니다. 평범에 기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주목 받는 인생도 아니고 특별한 존재도 아니라서 뭐라 명명하기도 어렵다. 주변인?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아주 재미있고 나름의 특징을 가진 듯 보이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보면 모두 투명인간이 아닐까. 그래서 놀란 라이언처럼 강속구를 주무기로 하는 선수가 아니라 아주 느린 공을 던지는 은 투명인간이다.

 

형의 최대의 무기는 느린 공이었다. 너무 느려서 아무도 치질 못했다. 형이 공을 던졌다. 나는 그 공이 날아오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느린 공이었다. 아주아주 느린 공, 나는 손바닥이 아픈 것처럼 엄살을 피웠다. 그리고는 말했다. "볼이야.“ - ‘느린 공, 더 느린 공, 아주 느린 공’, 281

 

단편들을 다 읽고 나니 스토리는 사라지고 이미지와 밋밋한 문장의 뼈다귀만 남는다. 형체없는 주인공들과 유령들도 사라지고 헛된 일상과 현실 바깥일이 궁금해진다. 소설을 읽는 일은 현실의 메트릭스 안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비춰보는 일이다. 열정도 냉소도 없이 바라보는 텔레비전 화면처럼 멀건 눈으로 창밖을 보는 일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인생처럼 덧없다. 소설을 해석하려는 헛된 노력처럼.

 

우리의 삶은 필연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필연처럼 움직이는 소설의 주인공이나 우연의 무질서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우연과 필연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이 삶의 진실은 아닐까. 긍정도 부정도 없이 묵묵하게 오르고 다시 올라야 하는 시찌프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등산객처럼.

 

필연의 사슬에 결박되어 있기보다, 우연이라는 무질서의 너울 위에서 표랑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 인간의 삶이다. - 강동호, 해설 영원히 우연적인 것이 기적을 구원한다첫 문장.

 

 

20120115-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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