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바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1
최승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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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시가 되고 시가 노래됨을 어렴풋이 알려준 광석이형 16주기.

 

시는 노력만으로 쓸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있다. 타고난 감수성과 언어의 활용 능력은 연습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를 만날 때 떠오르는 생각이다.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서울의 예수에 실린 시인의 눈빛에 감전된 것은 감수성의 백열등이 깜빡이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황지우와 이성복의 시를 처음 만나던 순간, 김영승의 반성과 김승희, 최승자의 시를 읽던 느낌, 나른한 5교시 박노해를 낭송해주시던 선생님의 떨리던 목소리 그리고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 최승호의 대설주의보세속도시의 즐거움을 뒤적이던 밤은 소리도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한다. 먼지 묻은 책장의 앨범처럼 가슴에 남아있거나 무턱대고 과거로 회귀하거나. 아주 오래된 기억의 편린들. 그리고 가끔씩 오래된 친구의 소식을 기웃거리듯 빛바랜 시집을 꺼내들거나 근황을 궁금해 하거나.

 

최승호의 시집 아메바는 낯설다. 기존에 썼던 시들에 대한 반성적 고찰 혹은 그림자 연습. 시인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 이 시집은 일종의 문체 연습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언어와 이미지를 먹고사는 아메바 같은 시들의 향연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낯선 시집을 읽으며 예전의 시들과 다시 만나고 변형된 이미지, 생경한 리듬, 낯선 의미와 부딪친다. 시의 이미지는 살이고 리듬은 피요, 의미는 뼈에 해당한다고 했던 인터뷰 기사가 떠오른다. 수능 모의고사에 출제된 자신의 시 문제를 풀었다가 모두 틀렸다는 항변으로 시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던 최승호는 이제 대학교수다. 상황이 변했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그의 시를 추동할 만한 내적 긴장과 감수성이 증발되고 있거나.

 

아주 오랜만에 최승호의 시집을 읽고 나서 몇 편을 옮겨본다. 그의 실험이거나 게으름에 대한 반성이거나. 혹은 살아있는 시인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쓸쓸한 뒷모습이거나.

 

 

03 나의 두개골

 

나의 두개골 안에

불타는 가시덤불의 거센 불길이

느껴지는 이 싱싱한 밤

 

03-1

 

밤이면 흐느적거리는 시의 촉수들,

뜨거운 두개골의 창문 밖으로는

오월의 장미넝쿨이 흘러내린다

 

 

04 문자

 

문자에 스민 그의 피, 그의 숨결, 그의 고통, 때로 얼음의 책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여온다. 그는 아직 얼음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04-1

 

방산 속의 허연 유령처럼

밖을 내다보는 희미한 얼굴,

얼음의 책의 저자

 

 

14 붕괴

 

붕괴된 백화점

철거되지 않은 거대한 벽면이

폐허 위에 기우뚱하게 서 있던 것과

전봇대를 삼키듯 휘감아버렸던 나팔꽃덩굴을 너는 기억한다

 

14-2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붕괴된 벽에

누가 언어의 사다리를 걸어놓고 기어오를 것인가

 

 

19 우리는

 

우리는 거대한 증발접시 안에서 속이 타는 물방울 같은 존재들인지 모른다

 

19-4

 

우리는 먼지들의 러시아워 속에 붐비는 먼지 같은 존재들이다

 

 

36 연중강우량 1mm

 

연중강우량 1mm

아이쿠 사막에선

모래에 뿌리 박은

가시 돋친 혀들이 선인장처럼 자라면서

뚱그런 철퇴 모양 번쩍이는 해 아래 이글거린다

 

36-1

 

아이쿠 사막에선

태어날 때도 아이쿠!

죽을 때도 아이쿠!

 

 

40

 

벽에 머리를 대고

혼자서 가만히 우는 아이가 있다

 

40-2

 

절벽에서 돋아난

마애불(磨崖佛)의 얼굴을

지우개도 없이 지우는 것은 바람이다

 

 

43

 

살이 얼마나 질긴지

때밀이수건에 먼저 구멍이 났다

 

43-4

 

뜨거운 무의 목욕탕

거기 들어앉았다 나온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49 한낮의 골목

 

한낮의 골목 텅

빈 골목을 꾸부정하니

지팡이를 짚은 늙은 고독이 지나간다

 

49-2

 

골목, 골목, 골목들이 점점 사라져간다

사막에는 골목이 없다

 

 

58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은 물렁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반죽덩어리, 그 물렁물렁한 책을 베개 삼아 나는 또 시상(詩想)에 잠긴다

 

58-1

 

물감을 베고 누운 화가처럼

물렁물렁한 책을 베개 삼아

나는 시상에 잠긴다

 

 

20120106-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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