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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소설집
김경욱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평점 :
어둠 속에서 한곳을 오랫동안 응시하면 분명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형태가 포착되고 미세한 동작이 감지된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착시(錯視) 현상이라고 치부하지만 실제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대해서 상상해 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과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 너머의 울림들은 좀체 전해지지 않는다. 그것을 포착하려는 불온한 시선이 바로 소설가의 그것은 아닐까.
현대소설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근대의 개념을 포괄하며 단순한 서사의 힘을 넘어 선 소설이고, 또 하나는 시간적으로 과거와 대립되는 개념의 소설을 의미한다. 19, 20세기는 그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도 눈부신 ‘속도’와 ‘변화’의 굴곡을 보여주었다. 역사 발전의 한 과정이라고 하기엔 울렁증이 생길 정도로 혁명과 전쟁을 겪으며 전 인류가 그 변화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구소련이 붕괴되고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눈에 보이는 적이 사라지고 대립과 갈등의 근본적인 이유를 상실했다. 일본의 가리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하기도 했다. 소설은 여전히 읽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어떤 소설이어야하는지 독자들은 스스로 반문할 필요가 있다.
김경욱의 소설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를 읽는 동안 단정하고 반듯한 모범생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형식과 문법에 충실한 단편들이라는 느낌이었다. 흠결을 찾아내거나 한편, 한편 분석하다보면 나름의 특징이 드러나겠지만 9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뒤에 붙은 권희철의 해설 또한 마찬가지다.
이 책의 표제작처럼 ‘신’에게만 손자가 없는 게 아니라 ‘작가’에게도 손자가 없다. 전지전능한 소설가는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인물을 창조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폭풍 같은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그러한 욕망의 극단을 참지 못하면 소설을 쓰는 것이다. 김경욱의 전작들과 이번 소설집의 차이는 크게 발견되지 않는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기이한, 특별한, 평범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들이 다양하게 그려진다. 할아버지와 손녀, 취업준비생, 광고기획사 대리, 전직 권투선수, 소설가와 사진작가, 주유소 알바생, 관광가이드, 평범한 가장 등 소설의 중심에는 넓은 범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작가의 몫이다. 독자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 아니라 독자들이 알아야 할 것, 기억해야 할 것,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은 어떤가.
분명하고 흥미진진한 ‘서사’ 중심의 소설이 있고 수려한 문장과 잠언들로 가득 찬 소설이 있다. 두 가지 요소를 함께 담아내려는 것이 작가의 욕망이겠으나 어느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작가도 있다. 아홉 편의 단편 중 ‘러닝 맨’과 ‘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이 인상 깊에 읽히는 이유는 알레고리와 욕망 때문이었다. 쉼 없이 일정하게 달리는 사내에게 쫓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인공의 착각일까 아니면 음험한 경쟁사회의 시스템일까. 전직 복서 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하지도 않은 삶을 자서전이라는, 누구나 한번쯤 써보고 싶어하는 책의 대필작가의 눈으로 바라본다. 시간이 많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있게 읽힐 것 같다.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을 말한다.
“나약한 소리 마시오. 한번 링에 오른 자는 영원히 내려올 수 없소. 발 딛고 선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링이기 때문이오. 흔히 말하지, 세상은 링과 같다고. 말은 언제나 쉽소. 세상이 링이라면 언제나 링에 오를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세상이 일종의 링이라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진실이오. 링이 왜 사각형인지 아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머무는 곳이 십중팔구 사각형이기 때문이오. 방, 교실, 사무실, 엘리베이터, 길, 버스 등등. 요람부터 관까지 모두 사각형이니 결코 사각형에서 벗어날 수 없소. 운명은 사각형이오. 작가 선생.”(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 - 114쪽
네모난 링에 오른 것처럼 죽기 살기로 달려야 하는 세상에서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지듯 한 허리케인 조의 이야기는 작가선생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남기는 유언처럼 들린다.
소설과 현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놓여 있다. 작가는 그 틈새를 들여다 보려고 엎드려 눈을 대고 독자들은 하늘을 향한 작가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그것은 작가가 본 현실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욕망하는 세상의 또 다른 이미지이며 상징이고 외면하고 싶은 누추한 삶의 진경이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모래사장을 홀로 걷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담은 표지는 별로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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