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작든 크든 누구에게나 서재는 있다. 고등학생의 서재에는 참고서와 문제집만 꽂혀 있겠지만 성인이 되면서 자신이 만들어가는 책꽂이가 바로 자신의 영혼이다. 보르헤스는 천국이 존재한다면 아마 도서관을 닮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서재는 바로 자신이 만든 유토피아의 모습일 게다. 당신은 그리고 나는 어떤 서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궁금해 한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타인의 비밀에 대한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늘 타인의 서재가 궁금했다. 학창시절에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 너무 궁금했다. 아주 가끔 시집을 읽는 여학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은 규정하기 어렵다. 학벌이나 직업으로 평가하기도 어렵고 사르트르식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들어봐도 지식인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의 총량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발언의 내용과 실천적 행동의 족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타인에게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으며 역사 발전의 합리적 원칙을 제시할 수 있어야 지식인이다. 다른 사람에ㅐ게 미래에 대한 전망을 논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의지와 인식의 힘을 가진 사람이 지식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행성:B잎새’의 『지식인의 서재』는 지식인과 서재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지식인의 가장 첫 번째 덕목은 말할 것도 없이 ‘책’이다.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지식을 쌓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 지식인이다. 그러니 서재는 지식인의 가장 근본적인 영혼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열다섯 명의 열혈 독서가들은 『한국의 책쟁이들』의 주인공들과 조금 다른 눈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책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사람들, 책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 서재가 삶의 중심이지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행복한 책읽기 종결자들이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새로운 정보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만 지겹도록 반복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사람, 남에게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 말이다 - 조국의 서재, 19쪽

책을 읽지 않고 늙어가는 수컷 영장류의 비애를 간명하게 전달하는 조국의 서재는 그의 미모만큼 핸섬하다. 규범적 틀을 깨고 나온 그의 생각과 변화의 욕망은 모두 서재에서 출발한다. 세상은 의문으로 가득 찬 사람이 필요하다는 러셀의 말처럼 그의 말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물론 열린 생각과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독서를 만 권 이상 하고 나면,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들이 많지 않아요. 같은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 게 많지요. 아주 독특하다고 생각되는 책은 10퍼센트나 될까요? 그래서 이제 저는 '아 이것은 정말 새롭다' 하는 것만 골라내어 독서를 하죠" - 이안수의 서재, 81쪽

충격적인 이안수의 말이다. 만권쯤 읽으면 그럴 법도 하다. 나는 태어나서 몇 권이나 읽었나 짐작해 본다. 세상의 모든 책은 고전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지만 만 권의 경지는 아직도 멀고 험한 경지인 것 같이 느껴진다. 양으로 승부할 수는 없으나 질은 양을 담보로 하지 않는가.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조국부터 최재천, 이안수, 김용택, 정병규, 이효재, 배병우, 김진애, 이주헌, 승효상, 박원순, 김성룡, 장진, 조윤범, 진옥섭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감독부터 건축가, 시인, 북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그 깊이와 넓이가 탄탄한 사람들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이들의 서재는 단순히 책을 꽂아 놓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며 내밀한 영혼의 숙성실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타인의 서재 훔쳐보기 프로젝트이다. 방송작가 한정원의 인터뷰와 전영건의 사진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편안하고 진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오갔을텐데 짧게 정리된 글만 보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가 충분히 한 권의 책이 될 만한 사람들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자신의 책읽기 노하우와 서재의 비밀, 책에 대한 관점 등 고수들이 들여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은 단순히 물질적인 형태 너머의 4차원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비밀의 문을 열어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우리는 15명의 고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읽을 책뿐만 아니라 읽어야 할 사람과 읽어야 할 삶이 너무 많다. 하지만 비균질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한계를 헤아려보면 ‘책’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느끼게 된다. 우리들의 삶은 유한하며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아는 것이 힘이든 모르는 것이 약이든 읽으면서 고민하고 생각할 일이다. 오늘도 읽고 쓰고 그리고 느껴야 할 일들이 우리에겐 너무 많지 않은가. 지식인의 서재는 아니더라도 나만의 서재 하나쯤은 지금 당장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두 칸짜리 작은 책꽂이부터 시작해보자.


11052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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