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십대의 탄생 -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 다른 탄생 시리즈 1
김해완 지음 / 그린비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공부가 다른 삶을 살게 한다는 말을, 앎이 곧 자유라는 말을 믿는다. 이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소박한 삶에서 나온 믿음이다. - 12쪽

2010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의 89%, 학부모의 93%는 “4년제 대학 이상의 학력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 목적은 당연히 ‘좋은 직장’ 때문이다. 사회, 문화적 상황을 무시한 채 단순 비교는 무의하지만 고교졸업자의 83%가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대한민국의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공부’라는 말을 지겹게 듣고 산다. 대한민국은 언제나 ‘공부중’이다. 그런데 무슨 공부를 하고 있을까?

공부는 당연히 ‘국영수’ 중심이고 수능이 그 절정을 이룬다. 스무 살이 넘으면 각종 고시와 입사시험이 또 한 번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대한민국의 저력은 ‘고급 인적자원’에서 나온다. 그러나 진짜 공부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한줄 서기 경쟁과 객관식 찍기 시험에 목을 맨다. 최근 들어 수시와 입학사정관제로 입시가 다양화 추세를 보이고 서술형 평가의 도입으로 과거의 문제점들을 조금씩 해결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삶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방향성이 없는 교육으로는 먼 미래를 내다보기 어렵다.

다양한 대안 교육이 실험되고 교육에 대한 난상 토론이 이어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교육은 당연히 사회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 권력과 자본의 획득 과정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이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좋은 직장’을 위해 오로지 ‘국영수’만 공부하는 교육과정도, 학교교육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중졸 백수 김해완의 『다른 십대의 탄생 :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를 읽다가 여러 번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단순한 감동이나 깨달음과 다른 무엇이다. 대안 학교를 거쳐 백수로 살아가는 93년생 해완이가 느끼는 교육과 사회, 사람과 세상은 그대로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또한 또래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탄탄한 내공을 쌓아가는 모습이 너무 부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슴 한 구석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을 주는 이 책을 나는 누구에게 함부로 권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대부분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대학입시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공공연한 목적이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진짜 대학을 가려고 16년을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대학에 가면 또 어떤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살인적인 등록금과 보이지 않은 스펙 경쟁, 높고도 험한 정규직을 향한 싸움 그리고 결혼과 내집 마련, 육아와 교육 문제의 순환 고리 속에 우리들의 삶은 철저하게 끼워 맞춰진다. 경쟁에 뒤질세라 남들보다 뒤처질세라 1분 1초를 아껴 오늘도 우리 아이들은 국영수 공부에 목을 매는 현실을 보자.

이런 현실에서 김해완의 책은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0.5초간 온 세상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진공 효과를 가져온다.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연구공간 수유 너머’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김해완의 생활과 그곳에서 길어 올린 인문학적 깨달음이 곧 이 책을 만들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바탕으로 2011년 대한민국의 십대와 ‘다른 십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녀가 인문학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이대로 지속가능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어느 교실 뒤편에 학생들의 희망 학과를 적어 놓은 것을 보니 절반 이상이 경영학과였다. 다양한 삶을 꾸려가면서도 즐겁고 행복하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현실과 이상의 충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나누며 걸어갈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다만 우리가 그 상상력을 제한하고 현실의 발판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점수로 한 줄 세우는 학교,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는 레밍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스승의 역할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무지한 자의 배움에 대한 의지를 지속시키고, 그가 자기 힘으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 111쪽

선생과 학생은 가르치고 학습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길을 걷는 동지다. - 155쪽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전지전능한 인간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교에 가고 선생을 만나야 무언가 배우고 가르치는 학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선생과 학생은 함께 길을 걷는 동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관계양상이 달라진다. 스승의 역할은 지식이 전달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깨우치고 배움의 의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기막힌 정답 찍기 기술을 가르치고 쉽고 빠른 지식의 습득은 진짜 공부가 아닐 수도 있다.

해완이는 색다른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맥도날드에서 알바를 하는 ‘44만원’ 세대다. 독립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실천하지만 현실의 벽은 만만치가 않다. 공동체 생활이 언제까지나 유지되기도 어려울 테고 어떤 방향과 목적으로 나아갈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해완이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언제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이미 속깊은 어른이 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를 통해 잠깐 김해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면 그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스승들 중 하나인 고미숙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읽은 책과 그가 공부하는 공간과 그가 꿈꾸는 삶과 그가 걸어가야할 우리 사회가 중첩되면서 환하게 펼쳐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우리는 해완이의 다음 발걸음을 기대할 필요가 있다.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해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희망은 학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 간판으로 살 수도 없으며 좋은 직장만이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꿈과 희망과 행복과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다린다. 또 다른 십대의 탄생을 기대하며.

우리는 함께 사랑하기 위해서, 더 온몸으로 만나기 위해서 서로 독립을 한다. 사랑과 독립은 이렇게 절묘한 이중주를 노래한다. 나와 세상, 나와 너는 이 노래를 부르며 만난다. - 199쪽

110426-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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