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시선 326
천양희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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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미세한 감각이 발 끝에 전해진다. 그러더니 속도가 줄고 엑셀이 말을 듣지 않는 낭패. 다행이 차량이 뜸했고 금방 갓길에 세울 수 있었지만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엔진의 피스톤 운동시 밸브의 타이밍을 조절하며 연료를 조절해주는 벨트가 끊어진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견인. 누가 10분 후를 예측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인터체인지 입구 카센터에 내려 길가에 심어 놓은 수선화를 한동안 들여다본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정호승의 시구절이 떠올랐다. 봄햇살을 받으며 노란 꽃을 피운 수선화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릴없이 다음 일정을 조정하며 오랜만에 무료한 정적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는 천양희의 시를 오랜만에 맛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세상에 많은 시인이 있으니 수많은 시가 명멸하고 읽히지도 않고 스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에서 천양희 시인은 축복받은 시인이 아닌가 싶다.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시부터 서정시 본연의 자리를 지키는 시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에도 시는 여전히 제 갈길을 걸어보지만 독자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는 언제까지 쓰고 읽히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미국에서 전자책의 매출이 종이책을 처음으로 앞질렀다는 충격적인(?) 소식 때문일까, 시는 더욱 아득해진다.

새가 있던 자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수 앞이 아니라
한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오나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 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 밥 딜런의 노래에서.


모든 문학은 개인적 상황과 감정에 이입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이 문학인 이유는 현실 밖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배설구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창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천양희의 시를 읽다가 문득, 호흡을 가다듬고 한동안 상념에 빠지거나 처음부터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소리 내어 되새긴다.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세상에 참 좋은 말은 얼마나 많은가. 풍성한 말잔치를 통해 그럴듯한 이미지와 언어유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시는 독자의 직, 간접적 경험과 조우하는 순간 오롯이 가슴에 새겨진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다양하다. 시집 한 권을 통해 시인의 생각과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고 한 편의 시에서 단 한 구절이 평생 가슴에 남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시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참 좋은 말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위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우두커니 봄이 가고 여름이 올까? 그리고 내년이 오고 십년이 흐를까?
나는, 우리 모두는 어처구니가 아닐까?

어처구니가 산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삼독(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삼충(三蟲)이
그야말로 우굴우굴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나이와 세월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도 있다. 아니, 젊다면 쓰지 않을 시도 있는 법이다.


순서가 없다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고
실패도 하나의 성과라고
어느 시인은
기막힌 말을 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마음을 잡아야 한다고
어느 선배는
의젓하게 말하지만

마음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
마음은 잡아도 잡아도 놓치고 마는 것
너무 고파서 너무 놓쳐서
사랑해를 사냥해로 잘못 읽은 사람도 있다고
나는 말하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은 위대한 것이라고
슬픔에게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다시 어느 시인은
피 같은 말을 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이므로*
삶에는 대체로 순서가 없다

*황지우의 시「피크닉」에서.


한 호흡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시집은 한 시간만에 읽는 짧은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오래오래 곱씹어야할 의미로 가득해야 한다. 천양희 시인의 시들은 무엇보다 오래오래 생각하며 읽게된다. 나만 그런가?

생각은 강력한 마약

생각은 구름처럼 뿌리가 없다
생각하다 흩어진다
생각이 화근이 된 뒤부터
가끔 생각 없이 하루쯤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
생각 어디에 고비가 있는 것도 같다
세상에 생각처럼 강력한 마약이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생각의 중독
생각하다 사람들의 깊이 괴로웠으므로 웃음을 고안했고
깊이 생각했으므로 신은 죽었다고 폭탄선언한 사람도 있다
생각을 껌처럼 씹다 뱉고
생각이 우산처럼 폈다 접힐 때
생각 끝에 나는 겨우
백사장에 생각 짧은 치욕을 썼다 지웠다
한줌 모래가 어찌
하루에도 천년을 사는 생각만 할까
생각해보면
나를 살게 한 건 생각 끝에 나온 생각이다
너를 생각한 것이 나를 살렸다 시여!
생각에 기대 시를 생각해내는 밤
생각은 오늘 나의 다짐이니
생각은 나를 따르고 시를 뒤따른다
바닥까지 생각의 허리 구부리고
이제 막 시 한짐 밀고 갈 시간이다
생각에는 먼 것이 있고
나에게는 생각이 있다


오늘도 옷깃을 여미며 하루를 살았다. 기약 없는 내일이 다가온다.

옷깃을 여미다

비굴하게 굴다
정신차릴 때
옷깃을 여민다

인파에 휩쓸려
하늘을 잊을 때
옷깃을 여민다

마음이 헐한 몸에
헛것이 덤빌 때
옷깃을 여민다

옷깃을 여미고도
우리는
별에 갈 수 없다



110417-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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