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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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는 거짓말을 일삼고 몸은 과장을 좋아한다. 눈빛은 정직하다. 눈빛은 거짓말을 못한다. 속이려고 해도 속여지지가 않는 것이 눈빛이다. 눈빛을 읽으면 진실과 가까워진다. 눈빛을 읽어야 한다. - P 15

전 인류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아우슈비츠는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20세기에 벌어진 대량 학살과 인종청소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남기고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존재의 탐구가 책읽기를 통해 가능하지 않겠지만 오늘도 여전히 수많은 작가들은 인간을 탐구한다. 그것이 문학이고 역사이고 철학이 아닐까 싶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천운영의 『생강』을 읽는 동안 가슴이 미어졌다. 왼쪽 가슴 아래께서 시작된 통증은 온몸으로 퍼졌고 순간순간 전율했다. 작가는 얼마나 큰 아픔 속에서 이 소설을 만들었을까.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천운영의 ‘첫 소설’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은 우리 문학이 잃어버릴 수도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웅숭깊은 고뇌가 문학이라고 믿는 독자라면 마땅히 읽어야만 할 것이다.

이근안은 경기도경찰청 공안분실장이던 1988년 12월 24일 국민회의 김근태 의원을 비롯한 숱한 사람들을 고문한 고문기술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 잠적할 때까지 16차례에 걸쳐 표창을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 후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28일에 자수했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가 되었다. 이근안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책을 읽는 내내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과 자괴감이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작가는 고문 피해자의 시선으로 이근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근안 자신을 서술자로 선택했다. 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일을 기억한다. 10년 다락방에 숨어 사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드는 고문기술이나 피해자가 당한 고통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체험은 문학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을 것 같다.

작가적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없다면 애초에 이근안의 입장에서 이 소설이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읽어내고 공포를 극대화하는 그의 능력(?)은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룬다. 작가는 악마의 탄생과정을 통해 집단 무의식과 인간성의 바닥에 대해 고민한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소설의 주인공 ‘안’이 도피생활을 시작할 무렵 갓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 딸 ‘선’이 등장한다. 선이 서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축이다. 아버지와 딸.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이 소설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객관화한다. 타인의 고통이 내 것일 수 없는 한계가 ‘선’의 한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다락방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을 통해 ‘안’을 은폐한 후 드러낼 수 없는 개인과 타인, 가족과 사회의 문제를 폭로한다. 행간을 건너뛰는 섬세한 심리묘사, 아내와 딸을 통해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이 소설은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에 대한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망가진 육체와 유폐된 영혼이 빚어내는 참담한 비극은 인류의 역사가 반복해온 가장 통렬한 분노이다.

악마의 발톱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역설한 악의 평범성은 우리 안에 내재한 놀라운 본능이 아닐까. 역겨움을 넘어 무기력한 슬픔에 빠뜨리는 주인공 ‘안’은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아마 그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아닐까 싶다.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통해 천운영은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과 보이지 않는 심연을 탐구해 왔다. 『생강』을 통해 나는 천운영이라는 작가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김치를 먹다가 잘못 씹어버린 생강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생강처럼 잘근잘근 씹어먹었으면 좋겠다. 눈 내리는 3월의 검은 밤이 서럽도록 아름다운 희망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110324-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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