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앎의 나무 ㅣ 아우또노미아총서 12
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 갈무리 / 2007년 5월
평점 :
사람들이 처음 이메일을 사용할 무렵 아이디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뒤에 붙어있는 숫자로 나이나 생일까지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닉네임과 아이들로 개인의 정체성과 관심분야 그리고 전공이나 직업까지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식의힘’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인 것이다.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안다’는 것을 넘어 형이하학적 세계와 분리된 아닌 형이상학적 영역에 대한 깨달음은 아닐까 싶었다. 나를 넘어서 타인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삶의 비밀을 읽어내고 싶은 욕망이며 세상의 진실을 포착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끝없는 호기심과 지식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졌고 난삽하고 계통없는 잡식성 독서로 출발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나는 누구이며 세상은 어떤 곳인가.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었고 그렇게 움직이는 모든 것, 행위의 근본질서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영원에 대한 도전만큼이나 부질없는 노력은 아닐까 싶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걷다 보면 길이 생길지도 모르고 가보지 않은 길로 접어들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또 길이 아니면 어떤가.
이웃 블로거 소나기님이 보내준 책을 읽었다.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에 이어 『앎의 나무』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 다른 나의 정체가 되어버린 ‘인식의힘’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책을 왜 읽는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말한 것은 모두 어느 누가 말한 것이다. - P. 33
이 책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우리가 인식하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는 세상의 모든 대상을 의심하게 한다.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 굳건하게 믿어왔던 세계에 대한 불안과 혼란으로부터 우리들의 지식과 정보와 인식방법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전체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하나의 견고한 구조물과 같다. ‘인간 인지능력의 생물학적 뿌리’라는 부제가 잘 말해주듯이 ‘앎’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결국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고민하는 책이다. 일상경험의 관찰과 행위가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어 자기생성과 증식, 섭동작용을 거쳐 개통 발생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어떻게 인식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현상 언어적 영역으로 확산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결국 거대한 ‘앎의 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책은 거대한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고 생물학적 차원에서 인식의 과정에 대한 탐구이며 ‘앎’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칠레 태생의 두 학자가 쓴 이 책은 아우또노미아총서 중 하나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에 대한 심오한 성찰과 과학적 분석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알기 쉽고 간명하게 ‘앎’의 영역을 정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접했다는 생각보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성장하는 과정의 비밀을 깨닫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과정에 따라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하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들은 섬세하고 정교한 흐름으로 앎의 나무를 설명한다. 처음부터 시작되는 고정관념과 타성에 젖은 의식 깨트리기는 신선한 충격이다. 하지만 무언가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과 달리 책의 대부분은 생물학에 기반한 인간의 의식과 인식과정을 탐구하고 있어 조금 지루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기초적인 지식과 자세한 설명으로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지만 책 전체가 씨줄과 날줄처럼 조직돼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한 번 읽고 저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 데, 앎을 모르는 데 있다. - P. 279
결국 이 책은 우리가 이제까지 확실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의심을 통해 가장 인간다운 것 중의 하나인 ‘앎’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책이다. 새로운 관점과 세계인식으로부터 또 다른 미래가 펼치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 세상 너머의 세상과 나와 우리를 넘어 선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10306-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