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인권 수첩 - 개인의 자유와 지구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인권 교과서 세상이 보이는 지식 3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공현 지음, 안미라 옮김 / 양철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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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3월이 돌아온다. 모든 학교에서는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이 신학기 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폭풍 전야처럼 3월 2일 아침부터 학교는 활기를 띠고 학생들은 바쁘게 움직인다. 모두에게 똑같은 출발이지만 누구나 같은 곳을 향해 걷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목표와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고 그만한 결과를 얻고 졸업을 한다. 이제 교문 밖에 나가 새 출발을 해야 하는 졸업생은 물론 이제 막 교문에 들어서야 하는 신입생에 이르기까지 학교는 인생의 통과의례처럼 중요한 곳이다. 용광로와 같이 뜨거운 열정과 환한 웃음으로 가득할 것 같은 학교는 교문에 들어서는 순간 공부와 시험, 경쟁과 한숨이 가득한 곳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학생과 부모들은 어떻게 청소년 시기를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거꾸로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과 태도에 따라 학교생활도 다르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자세도 다르다. 졸업 이후에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방법과 태도를 배우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교뿐만 아니라 학교 밖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개성과 능력을 기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며 잘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우고 깨닫는 과정이 삶이 아닌가. 그러한 삶이 바로 청소년들의 인권을 지키고 미래를 꿈꾸는 삶이 아닐까.

『청소년 인권 수첩』은 최근 학교인권조례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돌아보게 한다. 인권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아니다. 성장 과정에서 내면화되고 지켜나가야 하는 권리이다. 나이와 무관하게 자신의 선택과 판단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아존중감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삶의 조건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긍정적인 태도와 자신감은 자신의 진로와 미래를 개척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공부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인권은 문화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며 조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누려야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는 죽을 때까지 지켜야하는 가장 기본적인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세상이 보이는 지식’ 시리즈로 나온 이 책의 저자는 독일의 저널리스트이다. 인권활동가 공현이 우리 실정에 맞는 내용을 추가해서 내놓은 이 책은 작은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어 읽기 편하고 쉽게 이해되는 책이다. 어렵고 딱딱한 느낌이 드는 추상적인 개념을 일상생활에서 쉽고 재밌게 접할 수 있도록 구성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적극 추천할 만한 책이다. 인간의 존엄성, 인권 실현을 위한 방법론, 유엔, 국제비정부기구 등 언론과 민주주의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거론되고 한국의 인권과 한국의 청소년들의 현실을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인권을 위한 실천적 용기와 책임과 권리를 이야기한다.

생각이 바뀌는 것은 산을 옮기는 일보다 어렵다. 어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갖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주체적인 고민과 사유를 거쳐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다. 피상적인 현상, 타인의 견해를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그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청소년들에게 인권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논의하는데 언론은 이념을 문제 삼는다. 논점 일탈의 오류에서 벗어나서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보고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두발 자유화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더니 또다시 과거로 돌아간 적이 있다. 이제 학생인권조례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첨예하게 맞부치고 있다. 하지만 청소년들을 미성숙한 존재, 통제와 억압과 관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한 그들의 의견과 개성과 권리는 공부와 성적을 담보로 제한될 가능성이 항존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의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민주시민의 역량과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교육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가 아닌가.


110220-011 
 




고백 - 10년 간의 실수와 학교 이데아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 윌리암 세익스피어의 『리어왕』, 1막 4장 중에서

시작은 DMZ(De-Militalized Zone비무장지대) GP(guard post전투초소)였을까? 휴전 이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생태계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그곳. 망원경으로 북한군 초소가 내려다보이고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관찰할 수 있는 곳에 고립된 군인들은 외롭다. 그 외로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대학생이었거나 직장인이었거나 자신의 내면을 바라 볼 기회가 없었던 스무 살 언저리의 군인들에게 GP는 일종의 사원(寺院)이었다. ‘나’를 돌아보고 ‘너’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사회적, 역사적 관점에서 내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대학 4년간 읽었던 책의 두 배쯤 읽은 것 같다. 휴가 나올 때마다 쌀자루에 책을 담아 집으로 부치던 기억이 새롭다.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창이었고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유일한 멘토였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수많은 책들은 내 영혼의 아버지다. 전역을 얼마 앞두고 앨빈 토플러를 만났다. ROTC에게 특혜가 주어지던 시절이라 취업은 어렵지 않았고 안정적인 금융기관에 출근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이동』이 보여준 미래는 내 생각과 많이 달랐다. 정말 우연하게도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선배의 제의를 받고 출근하는 회사가 달라졌다. 책은 결국 첫 직장을 선택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자유롭고 편안한 근무조건과 그리 나쁘지 않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인터넷 SI(System Integration)업체에서 전공과 무관한 제안서를 쓰고 프로젝트 매니지먼트를 하는 일은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2년쯤 근무하다가 평생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와 국어교사인 아내의 권유로 임용고사를 거쳐 교직에 입문했다.


서른, 신규교사 1년차 - 교사는 뭘 하는 사람이지?

젊은 남자 교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몽둥이였다.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학교에서 처음 맡긴 일은 학생부 생활지도. 나의 하루는 교문에서 시작되었다. 군대 위병소에 헌병이 서 있는 것처럼 학교 교문에는 생활지도 담당교사가 버티고 서 있다. 교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었는지, 머리 길이가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낸다. 주눅이 든 학생들은 아침부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다. 이름표, 넥타이, 조끼, 바지통, 치마, 머리 길이, 신발, 양말, 스타킹, 화장, 염색, 반지, 귀걸이, 가방에서 속옷 색깔에 이르기까지 군대만큼 철저하게 통제하고 감시한다. 지각한 학생은 물론 규정을 위반한 학생은 모두 운동장에 엎드리게 한 다음 몽둥이로 때리거나 토끼뜀으로 운동장을 돌게 한다. 상쾌한(?) 하루의 출발이다. 교실까지 이르는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교실에 도착하면 또다시 담임 선생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남학생의 뒷머리가 옷깃에 닿는 순간 껌을 씹고, 염색을 하면 도둑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걸까? 교육은 통제와 억압이 아니다. 근대 이후 신체를 통제하는 것은 정신을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제러미 벤덤이 고안한 ‘판옵티콘’을 소개했다. 불꺼운 전망대에서 단 한 명의 간수가 불켜진 원형 감옥의 수많은 죄수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단 하나!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불안감이다. 통제된 신체는 통제된 영혼을 낳는다. 창의력과 상상력은 자유로운 정신의 발현이다. 네모난 틀 속에 갇혀 시키는 대로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미래 사회의 ‘창조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이 아닐까?

서른 살의 1년차 교사는 폭행, 흡연, 절도, 학교 밖의 문제아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얼차려를 주고 욕하고 청소시키면서 1년을 지냈다. 담임업무와 학생부 생활지도를 함께 떠안은 채 교재연구과 수업을 해 나가는 일은 정말 버거웠다. 게다가 0교시, 8교시 매일 2시간씩 보충수업을 해야 했다. 야자감독은 입가심이다. 대한민국의 교사는 뭘 하는 사람이지? 그러면서 차츰 조직생활(?)에 적응했다. ‘아~ 학교는 이런 곳이구나. 건물구조도 조직도 군대라고 생각하면 되는구나.’ 장교로 군대생활을 했던 나에게 담임은 소대장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했다.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진자, 그대 이름은 담임!

그러나 아이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이 너무 소중하고 예뻤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아침부터 두근거리며 출근을 한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사실이었다. 함께 이야기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웃고, 우는 동안 정들었던 아이들은 졸업을 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들과 만났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지만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 모두의 생각과 시스템이 변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들을 때렸던 신규교사 시절보다 더 부끄러운 건 가끔씩 내 생각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난 후의 씁쓸함과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이니까 지키라고 했던 순간들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배워야 하는 학교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 난감해지곤 한다. 졸업할 때까지만 참자, 학교는 원래 그런 곳이다, 선생들은 다 똑같다는 인식을 가지고 학교를 떠나는 많은 아이들을 보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뭘 하는 사람이지?


좋은 사람은 누구인가?

자공이 묻기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한다면 어떻습니까?”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 중에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이 싫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 공자의 『논어論語』 제 13편 ‘자로(子路)’ 중에서


혹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했지만 유교적 사대주의와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일 뿐 공자의 모든 논리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인용한 공자의 말은 ‘선택’의 순간에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이다.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다.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악한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어떻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구별할 수 있을까마는 옳은 일과 그른 일은 분명히 구별할 수 있고 그 일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다.

사람들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한다. 튀지 말라고 타이르고 중간만 하라고 충고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우리는 금세 스무살이 된다. 나이만 먹어버린 ‘어른애’가 되어 떠밀리듯 졸업장을 받고 교문을 나선다. 대학생이 되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지만 아무것도 준비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공부만 했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지식은 실천이다.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지식은 개인적 이익만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우리가 아닌 ‘나’만을 위한 지식으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던 농부 작가 전우익 선생님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고 말했다. 함께 나누고 모두 같이 걸어갈 수 없는 세상은 지옥이다. 현대 사회를 승자독식 사회라고 하지만 1등만 살아남은 사회는 지속 가능할 수가 없다.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미래 사회는 ‘국영수’ 실력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 나만의 무기가 무엇인지 찾아가는 교사가 되고 싶다.


학교 이데아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족해 족해 ……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좀 더 솔직해봐 …… 됐어 됐어 이젠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됐어 ……  - 서태지, <교실 이데아> 중에서

수능이 끝나고 합격의 기쁨으로 교무실에 찾아오는 아이들은 금세 잊히지만 한숨과 탄식, 눈물과 안타까움이 문자와 전화로 전해지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너는 공부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해 줄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그것들을 찾아주거나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모두 똑같은 것만’ 머릿속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나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기 어렵다. 전공이 아니라 대학이 중요하고 적성과 취향보다 직업과 연봉을 감안해야 하는 현실이 모두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20대의 40%가 비정규직이다.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과 미래 사회에 대한 준비를 위해 어떤 과정과 노력이 필요한지 대학에 가서 배우라고 하면 나의 책임이 조금 가벼워질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힌다. 어느 누구도 정답을 제시해줄 수는 없다. 스스로 찾아야 한다.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책을 통해 조금 더 자라는 아이들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 성숙을 모색해야 한다.

자기 성숙을 모색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개인으로서 내세울 장점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한 집단인 국가, 민족, 종교, 지역, 혈연, 출신 학교를 내세운다. - ,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중에서

전통사회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생득적인 지위를 통해 자신의 삶이 결정되었다. 마치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순전히 우연의 결과일 뿐인 신분제도는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그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는 없다. 우리는 나이와 경력을 내세우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선생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가야 한다. 본질적으로 고독한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동반자는 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상상을 자주한다.

상쾌한 아침공기를 맞으며 친구를 만나 학교에 갔다. 낡은 교문도 언덕길의 분수도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 기분이 괜찮은 하루였다. 아침부터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차량을 통제해 주시고 학생회 임원들이 돌아가며 캠페인을 벌인다. 무단 횡단을 하거나 위험하게 도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없다. 교실에 도착하면 친구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독서 삼매경에 빠진다. 짧은 아침 독서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학기 초에 한 권씩 가져온 학급문고만 읽어도 올해 40권의 책을 읽는다. 선생님과 함께 선정한 다양한 책들이 가까이 있어 따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 오늘 오후에는 단체 활동이 있는 날이다. 밴드부 친구들과 연습을 한 후 청소년 수련원에서 다른 학교 친구들과 합주가 있다. 저녁을 먹고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사회 숙제를 하기로 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들』을 일고 ‘사형제 폐지’에 대한 토론이 수행 평가다. 사형제에 대한 사회, 역사적 변천 과정을 조사하고 관련된 소설, 영화는 물론이고 사회문화 교과서도 참고해야 한다. 반대를 위한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예상 질문을 정리해야 한다. 논술이나 구술 면접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수업 시간에 준비한 것으로 충분하다. 하긴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더라도 선배들을 보니까 공부 안하면 2학년을 넘기기가 힘들다던데 대학에 가면 열심히 공부만 해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보충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이라는 게 있었다는 데 그 시간엔 도대체 뭘 했는지 궁금하다. 기분도 전환할 겸 이번 주말에는 빨간색으로 염색이나 해볼까.

혼자 꿈을 꾸면 공상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현실은 한 번도 만만한 적이 없었다.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보낸 지난 10년은 즐거움과 보람보다 부끄러움이 앞선다. 이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걷고 싶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얘들아 함께 걷지 않을래?


2009 수내고등학교 교지 『솔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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