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알랭바우디의 말투를 빌리자면, 이론은 문제를 해설하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론은 낡은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모험이다. - P. 7

  이택광을 세 번째 만나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에 이어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통해 저자의 문화이론에 대한 이해와 깊이를 확인했다. 책을 통해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사유의 폭을 넓히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의 내밀한 사적 공간을 기웃거리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얻는다. 그것은 물론 의도적인 저자의 책략일 수도 있고, 개별 독자가 확인하는 공감의 영역일 수도 있다. 저자가 읽은 책을 읽었던 기억과 낯선 글처럼 다시 만나는 자괴감, 생경한 개념을 내것처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오롯이 저자와의 깊은 대화를 나눈 느낌이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저녁에서 밤으로 저무는 시간을 함께 보내듯 그렇게 천천히 음미하며 읽은 책이다.

  저자는 문화이론에 관한한 국내에서 누구보다도 탄탄한 내공을 갖추고 있다. 그간의 저작들과 발표된 글들을 찬찬이 읽어보면 어설프게 낯선 이론을 도입하거나 소화되지 않은 개념을 소개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은 어떤 개념을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많은 이론가들을 호출한다. 마르크스에서 지젝에 이르기까지 근대의 철학자와 문화이론에 관련된 유럽의 사상가들은 물론 그들이 주창했던 핵심 이론과 용어에 대한 개념들을 철저하게 실천과 적용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관념적이고 지적인 태도로 말장난에 불과한 소개글이 아니라 실제 이 개념들의 차이와 반복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근대 이후, 아니 정확히 19세기 이후 정치와 사상적 지도의 정점에는 항상 마르크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나치게 확고부동하여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부담스런 이념적 존재가 되어버렸고 현실 정치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과 몰락으로 20세기가 흘러가버렸지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에서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좌파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고 미래의 희망이라는 어줍잖은 변명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이론의 중심에 서 있는 마르크스에서 출발해서 프로이트, 아감벤, 벤야민, 헤겔, 라캉, 사르트르, 지젝, 데리다, 네그리, 랑시에르, 알랭 바우디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섭렵했을 법한 이론들을 총망라하여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대안도 아니고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도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정치한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이며 특히 인문학이 무엇이며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실천과 적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론은 낡아빠진 구식 동력기에 불과하다. 갈고 조이고 다듬어서 보다 상식적인 혹은 개념찬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아야겠다.

새로운 이론은 없다. 다만 '다른' 이론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같은 풍경이라도 다른 위치에 섰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던 사물을 볼수 있다. 이론은 이런 위치 변경을 가능하게 해준다. - 이택광,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14쪽

  11장에 걸쳐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이론과 개념들을 소개하고 현실 적용의 문제를 고민하는 모습이 즐겁고 재밌을 수는 없다.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책이나 어렴풋하게 정리되지 않았던 개념들이 명확해지고 비교와 분석을 통해 분명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수많은 이론들을 정리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가이드’라는 제목처럼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 오히려 추천할 만하다. 의욕과 노력만 앞세울 일이 아니라 친절한 안내에 따라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노력이 단순히 이론을 모아 소개하고 해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무엇이고 인문학적 사유가 왜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면 이 책은 의미를 넘어 선 것이다. 언제든 지적 호기심과 이론적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열린 이야기들이 가득한 책이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간주곡’이다. 장과 장 사이에 놓여 있는 글들이 감칠맛 난다. 공부와 학문과 글쓰기와 과거의 책읽기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써내려간 이야기들이 오히려 이 책의 생기를 불어 넣고 현실감을 극대화한다. 뜬 구름 잡는 개념놀이가 아니라 현실과 정치 지형도의 위치를 가늠하며 인문학의 의미와 개념을 다시 한 번 고민한다. 우리에게 지식이 왜 필요하고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우리들의 현실과 맞물려 뼈아픈 충고로 들린다.

지식은 기본적으로 범용성이 있어야 한다. 범용성이 없는 지식은 아집에 가깝다. 그래서 학문은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다. 공부는 재미있지만, 학문은 지루하다. 지금 한국은 학문을 내팽개치고 각자 공부하는 분위기이지만, 이런 분위기도 오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 이택광,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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