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요한 것은 창조성이다. 학문적 성취든 예술 감상이든 창조적인 시각만이 의미를 발견해내고 만들어낸다. 이 창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앞에서도 말한 직관이다. - P. 7
 

그림 읽어주는 남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기막힌 우연히, 혹은 정해진 운명처럼 사람을 만난다. 이 모든 만남이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잊을 수 없는 추억과 행복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남기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장 큰 삶의 목적이면서 불행의 시작이다. 우연한 만남이 삶의 방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주헌의 『지식의 미술관』은 의도적인 만남을 원하는 독자에게 적합한 책이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를 처음 만난 게 10년 쯤 전인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한젬마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수없이 암기 위주의 미술 시험을 위한 공부를 벗어나 편안하고 재미있게 그림을 즐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렇게 우연한 만남 때문이었다. 당시에 이 책이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예술에 대한 ‘권위’와 ‘지식’에 대한 불편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그림을 이야기했다. 나는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1~3』을 읽고 본격적으로 예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여러 책과 칼럼을 통해 미술 이야기꾼으로 활약해 온 이주헌의 『지식의 미술관』은 대중적 그림 읽기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진중권의 현란함과 달리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림을 읽어주는 남자가 바로 이주헌이다.

  이 책은 제목 자체가 모순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림 감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창조성’을 꼽는다. 지식보다 직관을 강조한다. 하지만 지식의 축적과 반복적 경험은 직관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지식과 직관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면서 영원한 순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말은 아닐까 싶다. 시작은 가볍게 무엇을 읽어내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나름의 방법대로 읽으면 된다. 그림을 보는 데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숨은그림찾기 같은 상징과 알레고리, 화가의 의도와 사회적 맥락까지 읽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손색이 없는 책이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서 이 모은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림을 읽는 30가지 키워드

  이 책의 체계와 구성을 잠시 살펴보자. 전체 서른 개의 키워드를 배열하면서 다섯 개의 묶음으로 유사한 것들끼리 묶었다. 각 장 끝에 생소하거나 익숙한 용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실제 사례를 통해 알기 쉽게 제시되었다. 똑같은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의 문제는 작가만의 몫이다. 독자들이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더라도 작가의 입장에서는 정확한 사실과 개념들을 재미있고 쉽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능력은 바로 거기에서 판가름 난다. 이주헌의 글이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밝힌 대로 그림을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창조성’을 기르기 위해 지식과 경험은 필수적이다. 그 서른 개의 구슬을 어떻게 꿰어야할 것인가는 어쩌면 독자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책을 통해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어도 독자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그림을 감상하고 체험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모두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책은 그림에 관심이 생기는데 체계적인 이론이나 미술사의 지식보다 우선 실제 그림을 통해 즐거운 감상을 시작하고 싶은 독자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나도 꽤 많은 미술 관련서적을 섭렵해서 잡다한 지식의 조각들이 머릿속에 헝클어져 있지만 계속해서 관점과 말하는 방식이 다른 작가의 책을 읽어댄다. 왜냐하면 읽을때마다 같은 그림이 다르게 보이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나만의 주관적 관점이나 창조적 그림 읽기는 아직 부족하다는 말일 것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읽은 『그리스 귀신 죽이기』에서 박홍규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이 여전히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한 그림을 이주헌은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를 통해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중첩되면서 상반된 부분을 찾아냈지만 창조적인 안목과 나만의 분석을 제시하기는 아직도 어렵게 느껴진다. 지식과 경험이 ‘창조적’ 그림 감상을 방해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다’는 말을 앞세우며 눈과 귀를 닫고 살고 싶지는 않다면 이 책을 통해 미술관에 놓여 있는 수많은 예술 작품과 대화를 시작해 보자. 그림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사실 이 책에는 조각과 현대의 설치미술까지 언급되어 있다. 수많은 미술의 이론과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재미있게 보았던 그림이나 인상적인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만 기억해도 좋다. 다음에 또 다시 만날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겹쳐지고 있지만 잊었던 내용을 다시 보는 즐거움 같은 그림을 조금 다르게 읽는 기쁨은 각기 다른 저자의 색다른 그림읽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

  이 책에서 재미있게 읽은 시각상과 촉각상의 차이는 우리가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말이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람과 아는 대로 그리는 사람의 우열을 가리자는 말이 아니다. 찰나의 대상도 중요하고 영원한 진리도 중요하다. 작가는 시각상보다 촉각상이 ‘진리의 전달’ 면에서 유리한 이미지라고 말하지만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아니, 유한한 우리들의 인생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만큼 멀고도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우리에게 서양 미술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미적 체험을 제공하지만 독자들을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삶의 애환과 굴곡진 역사 그리고 현재 삶의 모습을 돌아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모든 미술관에 박제된 예술품들은 우리들 삶의 감각적 재현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즐기고 예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어떤 측면을 보다 정밀하게 고민한다는 말이다. 단순한 문화 자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러한 시간을 제공한다. 그래서 나는 보는 것이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 보이는 대로 그려진다는 것은 찰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요, 그것은 필멸의 운명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는 대로 그려진다는 것은 영원한 질서의 대변자가 되는 것이요, 영생을 약속받는 것이다. 촉각상은 시각상에 비해 이런 ‘진리의 전달’에 보다 유리한 이미지다. - P. 87


100120-0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