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힘이 세다 - 죽어있는 일상을 구원해줄 단 하나의 손길, 심미안
피에로 페르치 지음, 윤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장면 1.

  작지도 크지도 않으며 깊지도 넓지도 않은 강이 흐르면서 돌들과 부딪치는 소리. 짐승이 웅크린 것처럼 거대한 산 능선이 만들어낸 실루엣. 희뿌윰한 달빛과 드문드문 박혀 있던 몇 개의 별빛. 버드나무 벤치 아래 그 광경을 잊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그녀가 처음 말을 건넸다.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장면 2.

스무 살. 강릉 경포에서 버스로 한참을 더 가다가 바닷가 민박을 보고 내렸다. 민박집 방에 비스듬이 기대면 미닫이 유리문을 통해 하늘, 바다, 모래가 3분의 1씩 보였다. 그렇게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다 죽으려던 순간이 있었다.

장면 3.

수색중대의 겨울, 비무장지대(DMZ)의 15시간 매복 작전. 영하 20도가 넘는 칼바람과 긴장. 완전한 어둠속에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밤하늘에 박혀있던 별들. 파랗게 밝아오는 새벽과 함께 철수. GOP 통문을 향해 산등성이를 오르다 뒤를 돌아본 일출. 해발 1,000고지가 넘는 능선 아래 안개는 강물처럼 일렁이고 산봉우리들은 군데군데 섬처럼 떠 있는데 붉은 해가 솟구치던 찰라, 이 순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아가는 동안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장면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기막힌 경험에 대한 이야기다. 그 장면, 그 상황, 그 느낌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사람마다 다르다. 개별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심미안’은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구별한다. 이것은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심리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이다. 물론 아름다움에 관한 선호는 시각적인 것에 한정시킬 수는 없다. 아름답다는 것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사물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 P. 23

  피에로 페루치는 <아름다움은 힘이 세다beauty and the soul>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리들의 ‘존재 방식’에 관한 책이다. 정신분석과 명상법을 통해 종합심리요법의 권위자라는 저자의 이야기는 깊고도 정교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거나 확인할 수 있는 단순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아름다움이 갖는 특별한 효과에 대해 광범위하게 살펴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우선 추상적인 개념의 아름다움에 대해 필요성과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은 우리들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확인시켜 준다. 주관적 인식을 토대로 한 개별적 취향이 아름다움은 아닐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아니,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아름다움에 관한 책이 아니라 사람과 인생에 관한 책인 것이다.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서 교양이 있거나 똑똑할 필요는 없다. 종종 교양이나 지성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미학적 경험이 강하고, 진실되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려면 오히려 자신의 판단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름다움과 점차 친밀해지면서 자신과의 접촉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 P. 95

  사실 정신분석, 명상, 심리 등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아름다움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움의 힘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시작이다.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 치유와 구원, 관계와 공감, 인식의 창이라는 장들을 통해 저자는 독자들에게 조용한 명상의 시간을 제공한다.

  마치 혼자 산책을 하며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미소 지으며 아름다운 삶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듯하다. 나는 누구이며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영혼과 무의식의 세계에 신비한 힘을 가져다주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하다.

감정이 승리하면 우리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반면에 이성이 승리하면 냉혹하고 단절된 사람이 될 위험이 있다. - P. 273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만 상처받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이성에 기대게 된다. 아름다운 것이 감정적인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성이 냉혹하고 단절된 사람을 만들기 쉬운 것처럼 보이는 아름다움과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사이에는 넓은 간극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촛불을 켜 놓은 채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나를 돌아보고 세계를 관찰하는 일이 아름다운 명상의 시작은 아닐까. 비밀스런 의식이나 환상적 종교체험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나를 돌아보고 지극한 아름다움을 통해 맑은 영혼을 가꾸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시작되어야 한다.

예술은 ‘경험의 절정’ 혹은 ‘몰입’으로 쉽게 인식을 확장시킨다. 또 예술은 학습 동기를 자극한다. 협동심만큼 독립심도 키워준다. 사회성을 향상시키고, 분석과 통합 같은 지적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훈련시켜준다. - P. 280

아름다움과 지식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있다. 바로 신념이다. 신념은 아름답다. 신념은 아주 중요하고, 많은 사람의 인생에 도달할 수 있고, 사람들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신념은 문명의 안내자다. - P. 281


  예술만큼 아름다운 것이 신념이다. 신념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만 영혼을 팔아 개인적 이익이나 현실적인 욕망을 얻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있을까. 책을 읽고 나서도 아름다움의 힘을 실감하거나 심미안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무엇이 아름답고 그렇지 않은 지는 누구나 안다. 다만 그것이 사라져가는 현실, 우리 안의 건조한 바람이 문제는 아닐까 싶다.


091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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