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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를 던지다 - 왕들의 살인과 다산의 탕론까지 고전과 함께 하는 세상 읽기
강명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이탁오는 어떤 진리도 스스로 자신만이 진리라고 주장할 때 그 진리는 더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한 것이다. - P. 76
‘진리’를 논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세상에 객관이 존재하지 않듯이 진리는 현실밖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신념과 진리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밖에 없으며 어떤 사람도 그것을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시대에 비추어 보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다수결과 다르다. 잘못된 법과 제도가 통용된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이 전근대 사회에서는 자연스런 사회 현상이었지만 그것을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폭넓은 안목과 미래지향적인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최선의 가치일 수 없듯이 자유경쟁과 자본의 논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고 해서 미래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강명관의 <시비를 던지다>는 조선 사회를 통해 21세기 한국사회를 조망하고 있다. 한학자인 저자는 조선시대를 학문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밝혀보지 않는다면 지식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처한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만족스럽게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위해 역사가 필요하고 선인들의 글을 도구로 삼았다. 이 책은 그렇게 저자의 학문적 열정을 통해 바라본 21세기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다. 저자가 선별하여 제공하는 글이지만 오늘에 되새겨 볼 만한 글을 읽다보면 책은 우리에게 영원한 길잡이며 삶의 교훈과 미래에 대한 지혜를 알려준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전체 4부로 나누어 노비와 비정규직을 비교하고 역대 왕들의 행적을 돌아보며, 학문적 진리를 논하고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선조들의 고민을 살펴본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매일 일어나 숨 쉬고 살아가는 일상이 편리해졌지만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과거제도가 공평하게 치러지지 않았고 21세기 수능도 공평한 경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으며 탐관오리와 지방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 지배층의 백성 훈육과 입시에 짓눌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꾼다.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치고 있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내일을 꿈꾼다. 하지만 소통과 어울림은 요원하기만하다. 그들만의 세상은 계속되고 있으며 백성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국민이란 명사를 들을 때면, 백성이란 명사가 떠오른다. 백성이 사실상 멸시받는 ‘상것’의 현실을 덮고 있는 호사스런 말이었던 것처럼, 국민이란 명사는 다른 어떤 명사를 그 속에 덮고 있는가. - P. 93
분명한 것은 돈과 권력, 학벌과 인척관계로 결합한 극소수 귀족층의 한국 사회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는지, 외국 국적을 가진 자녀를 두고 있는지, 왜 특정 대학 출신들인지 묻는 것조차 이제는 어리석다. 이런 속성의 ‘고소영’과 ‘강부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21세기 대한민국은 정확하게 19세기 조선의 연장이다. 세상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 P. 118
“일제고사 좋아하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산의 <하일대주(夏日對酒)>의 한 구절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들만이 재상이 되고, 그들만이 판서와 감사가 되고, 그들만이 승자가 되고 그들만이 헌관(憲官)이 되네.” - P. 274
부정적 시각과 비판적 안목은 구별되어야 한다. 비판을 인정하지 않는 무모함이 영원할 수는 없다. 국민과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먼 안목으로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삶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꿈일 수도 있다. 겸손하지 못하고 오만과 독단으로 결정된 일들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아이들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놓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념과 정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 고민해 볼 시간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뼈아픈 충고와 자기반성의 시간을 촉구한다. 멀지않은 과거였던 조선시대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비춰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수많은 고민들은 어쩌면 얼마 전 선조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발짝만 비껴서서 스스로를 돌아보자. 나의 믿음과 진리에 시비를 걸어볼 시간이다.
090901-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