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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재구성
하지현 지음 / 궁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진정한 죽음은 망각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 존재는 소멸하고 만다. 육체적 죽음과 별개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의미망에서 잊혀지면 그 사람은 비로소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거꾸로 살아있다고 해도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 삶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나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또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되기도 한다. 가족, 학교, 직장, 지역사회, 동호회, 각종 커뮤니티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곧 한 사람의 삶이고 그 사람의 정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1차적 관계도 있고 직장동료 같은 사회적 관계도 맺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관계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 관계 안에서 충만한 사랑과 행복을 찾기도 하고 인생의 비극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현의 『관계의 재구성』은 바로 이런 관계들을 조망해 보는 책이다.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관계망 속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우리의 삶은 큐브의 한 조각과 같다. 상하, 좌우 서로 다른 색을 맞추고 정확한 위치를 찾아 제 몫을 해내야 한다. 변신로봇처럼 대상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페르소나를 통해 사회적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힘겨울 때가 많다. 저자는 우리 주변에서 피할 수 없는 관계 양상들을 점검하고 그 관계의 특징들을 면밀하게 검토한다. 상처받는 이유와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자신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먼저 그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살펴보자. 우리 인생의 출발인 부모와의 관계다. 유년기에 맺은 부모와의 관계는 일생을 지배한다. 최초의 신뢰 대상이며 세상을 보는 창의 역할을 하는 부모는 나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의 기초를 형성한다. 형제라는 거울을 통해 다양한 페르소나를 익히고 친구를 통해 비밀을 공유하며 나의 또 다른 자아를 확인한다. 성장한 후에는 결혼을 통해 부부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를 형성한다. 인생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나는 중년에 일어나는 제 2의 사춘기는 현실의 벽을 인정하고 남은 후반생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이렇게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사랑, 공감, 후회, 상실 등 다양한 감정을 통해 기쁨과 행복, 좌절과 절망을 경험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한 인간은 성장하며 삶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된다. 따라서 ‘관계’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시작이며 결과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관계와 감정들을 하나씩 풀어본다. 상황에 따라 또는 나이에 따라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지 그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확인해준다. 우리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들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이 문제를 풀어가는 도구로 사용한 것은 ‘영화’다. 그는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굿 윌 헌팅>,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통해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확인하고 <스타워즈>와 해리포터> 시리즈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의 정체를 밝힌다. <냉정과 열정 사이>, <봄날은 간다>는 사랑과 돌봄의 차이를 밝히는 도구가 되며, <나비효과>, <박하사탕>을 통해 후회라는 감정을 다룬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아들의 방>은 영원한 이별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 상실이 주는 고통을 말해준다. 이 밖에도 다양한 영화 속의 관계를 빌려 실제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관계 양상을 설명한다. 때로는 동일시를 통해 또 때로는 감정이입을 통해 울고 웃었던 영화들을 재해석하는 재미는 이 책이 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항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관계 맺을 사람들에 대해 간접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책이다. 비록 영화 속 인물이지만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거나 유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책을 읽는 동안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복잡한 수학 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가듯 그 원리와 근본적인 대책을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나를 알고 타인과의 관계 양상을 파악하면 주어진 숙명을 이해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090828-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