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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몇 장면. 서울역 앞에 전경 버스가 불타고 서울 시내는 온통 태극기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였다. 광화문 근처의 빌딩이나 건물마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까지 거리마다 넘쳐났다.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창밖의 비현실적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열정을 보았다. 대학생들의 외침도 토할 것 같은 최루탄도 사라졌지만 그때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았고 내 의식을 규정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낯선 풍경은 버스가 마포대교를 넘어 자주 거닐던 한강 둔치를 지날 무렵 테니스장의 한가로운 사람들이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하던 아저씨들의 여유 또한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 때의 일을 쓴 ‘제 8요일의 일기’라는 글이 영등포 여고 교지에 실렸었다. 책장 한 구석에 먼지 묻고 빛바랜 교지 한 권이 그 때를 기억하며 꽂혀있다.
학교에는 좋은 선생님들 계셨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존경하지는 않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페퍼포그나 지랄탄의 위력을 알아갈 무렵 87년을 이해하게 되었고 박종철이나 이한열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게 되었다. 벌써 10년도 훌쩍 넘은 이야기니 6월 민주항쟁이나 6.29선언은 사람들의 먼 기억 속에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2009년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왜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십시일반>이나 <사이시옷>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즐겨 권하는 만화책이다. 창비에서 새로나온 <100℃>는 6월 민주항쟁의 뜨거운 기억을 만화로 엮었다. 평소 만화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널리 알려진 만화도 잘 모른다. 하지만 만화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공감과 응원을 보낸다. 이 만화책을 보면서 몇 번 울컥했고, 몇 번쯤 아련했으며, 몇 번은 한숨을 쉬었다.
프롤로그로 시작되는 반공소년의 모습은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웅변대회의 주제는 공산당을 때려잡고, 북괴를 무찌르자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는 북한도 아니고 북한 괴뢰군의 준말로 지칭했다. 경제적, 군사적 차이를 통해 체제 우월성이 판가름 난 이후에도 우리는 6.25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직도 그 상처와 후유증은 서로의 생채기를 후벼파며 대립과 갈등을 조장한다. 그래서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과 모순의 일부는 아주 오래된 과거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치유되지 않고 극복하지 못한 일들은 해결이 아닌 외면으로 일관되어 왔다. 앞으로도 그것이 지속 가능한 사회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시골에서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대학생들의 내적 갈등, 애타는 부모의 심정은 이제 책 속에서나 만나게 되었다. 이념을 넘어 실용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취업과 생존 경쟁에 내몰려 있는 88만원 세대를 양산하고 있다. 이대로 좋은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사회적 모순을 깨닫고 지는 싸움이지만 도전하던 청년 정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더 중요한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공감하던 시대는 다시 올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지금은 99℃라고 생각하며 늘 100℃를 향해 조금만 더 실천하고 연대하고 배려할 수 있다면 좋겠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투표가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과 실천에서 출발한다.
부록으로 실린 시민교육센터(http://www.civiledu.org)에서 강사로 활동중인 이한 선생님의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교안>을 바탕으로 각색하고 재구성한 ‘그래서 어쩌자고?’는 부록 이상의 의미를 전해준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스스로 찾아서 배워야 한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는 상급학교 진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준비해야 하는 미래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것이 된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문제를 푸는 공부가 아니라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들의 권리와 다수결의 모순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만화로 된 이 책은 만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87년 6월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며 항쟁의 중심에 서 있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힘과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3%의 소금이 바다를 썩지 않게 한다. 전 국민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저자의 말대로 옳다고 말할 순 없지만 더 마음에 드는 무언가가 소수가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증명될 수 없는 취향의 문제지만 가치란 매우 소중하다. 그것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가치인가에 따라서 말이다.
가치란 것은 증명될 수 없고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서, “내가 옳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난 이게 더 마음에 들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상대주의적 태도밖에 취할 수가 없다면 민주주의란 그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엉거주춤한 동거를 견디며 끝없이 제 편을 늘려가는 머릿수 싸움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 - P. 210 ‘작가의 말’ 중에서
090616-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