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리석은 자를 견딜 줄 알라. 똑똑한 자들은 언제나 참을성이 없다. 지식이 많을수록 참을성은 줄기 때문이다. 통찰력이 큰 자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제일 우선해야 할 삶의 원칙은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이며 지혜의 절반은 거기에 달려 있다. - P. 246

  책을 읽다가 바로 전에 읽었던 책을 만나는 일은 우연일 뿐이지만 즐겁다. 그라시안의 <지혜론>을 읽은 후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다가 인용된 그라시안의 말에 또다시 눈길이 오래 머문다. 결국 어떤 책을 통해서든 우리는 삶의 지혜를 간구한다. 약삭빠르게 이익을 얻기 위해서나 높은 지위를 탐해서가 아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고 하루하루 일상 생활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적인 충만감이 있어야 한다. 만족스런 삶은 스스로에게 충실하며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이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이 생활이어야 한다.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도 않지만 모두가 얻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돈이나 명예, 권력과 지위를 탐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즐기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얻어진다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전체의 행복과 삶의 질서가 아닐까 싶다.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사회에서 모든 것에 평등을 우선적 가치로 내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공정한 게임이 이루어져야 하고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건전한 상식이 통용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과연 좌파적 상상력인가?

  헌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삶의 양식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 제국주의를 주장하거나 공산주의를 대한민국의 체재로 바꾸자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나처럼 뉴스를 끊기도 하며 철저히 현실을 외면하기도 하고 취미생활에 몰두하며 정치혐오증을 키우기도 하며 적극적인 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온 논객 유시민은 책을 써서 그 분노의 발톱을 드러낸다. 사람의 관점은 다양하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제각각이다. 유시민의 눈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태도로 감정을 앞세우거나 힘과 권력을 들이밀지는 않는다. 유시민의 힘은 거기에서 나온다. 이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권력의 그림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의 발언에 다시 귀 기울일 수 있다. 스스로 이념 성향을 사회적 자유주의라고 선언했지만 그가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통해 보여준 모습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정치인 유시민이 선택할 문제일 뿐이다. 그의 과거 이력과 정치적 성향이 모두 삭제될 수는 없지만 그의 말과 논리는 여전히 흡인력을 발휘한다.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똘레랑스의 정신에 입각하여 객관적인 상황과 논리적인 접근법으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가져할 현실 인식의 태도이다. 모두 옳거나 모두 틀린 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가정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열린 마음이라면 일단 대화가 가능하다. 그것조차 안 되는 사람은 이념적 성향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삶의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유시민은 냉정하고 차가운 머리를 가졌으며 타인을 설득하고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펜을 가졌다. 현실 정치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던 것은 한국적 풍토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날선 논리와 비판 정신 때문이다.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는 칼날이 자신을 향해 돌아 올 수도 있는 법이다.

  참여정부의 도덕성마저 무너져 내린 다음에야 유시민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은 할 말을 잊게 한다. 권력의 역주행을 견뎌내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금 새겨 보아야 할 일이다. 과연 앞으로 4년만 견디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가 또다시 들어설 것이며 그에 걸맞는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지배할 것이다. 아직도 절대 권력의 공고한 위치에서 왕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통령에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며칠 전에도 이명박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는 누가 죽였으며 어떻게 살릴 것인가? 이명박이 경제를 살릴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경제가 아니라 나를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명박이라고 믿었던 순진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는 그렇게 많았던 것일까? 노무현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에 치를 떨며 이명박을 찍었을까? 과거 회상을 통한 보상심리를 얻자는 게 아니다. 작금의 현실을 돌아보자. 촛불을 들면 잡아간다. 시위는 하지마라. 법치주의 기본 개념도 모르고 법치주의를 외치는 정부는 국민을 협박하고 검열하며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감시와 처벌을 통해 개처럼 길들인다. 모든 국민들을. 지금도 헌법은 유효한가?

  한번도 댓가를 치르지 않고 민주공화국을 공짜로 얻은 대한민국의 업보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한홍구의 지적대로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근대를 맞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기형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성장한 경제만큼 우리의 정치도 권력도 민주적 토양과 기반이 허약하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인의 문제가 아니다. 생활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자세와 태도에 기인한다. <입시전쟁 잔혹사>에서 강준만이 간파했듯이 생존 경쟁에 내몰렸던 질곡의 세월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핑계거리는 많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가장 기초 질서인 ‘헌법’조차 무시되는 세상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유시민의 이 책은 헌법의 당위와 권력의 실재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는 행복, 자유, 주권 등 헌법의 개념과 가치를 실제 생활과 연결지어 상식선에서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이 개념들이 이명박 정부 혹은 최근의 상황과 맞물려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밝히고 있다. 앞서 밝힌대로 설득력 있고 타당한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문제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며 원인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게 한다. 유시민의 글이 가진 최대 장점은 바로 이것이다. 속 시원하게 공감하며 터놓고 대화를 나눈 느낌이 아니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두 눈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보며 토악질을 하고 싶었다. 에필로그에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차용한 ‘악의 평범성’을 현실에 대입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090507-0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