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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양피지 - 캅베드
헤르메스 김 지음 / 살림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반신반의 하는 경우 대개 실패할 확률이 높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선입견일 지도 모르지만 경험상 그렇다.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이지만 세상이 이성과 논리로만 살아지지는 않는 법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선택의 순간은 잔인하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만 망설이다 보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후회라는 대가를 치르거나 다른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만든다.
책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고 사람을 선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행복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른 갈등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치고 어쩔 수 없는 길을 걷기도 하며 엉뚱한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법이다. 계획된 길을 순서대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생의 이면에 숨은 진실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알려주겠다고 나선 많은 사람들과 책들과 예언가들이 있다. 믿어도 그만 믿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 방법에 대해, 지름길에 관해 알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 틈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만큼이나 많다. 헤르메스 김의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도 그러하다.
철학자 김용규의 필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전의 저작들에 대한 믿음과 자기계발 종류의 책 사이에서 한참 망설이다. 출판사가 보내주겠다는 책을 받아보기로 했다.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떨치지 못하는 이 묘한 느낌을 뭐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책의 의도와 글 사이의 조화만큼 기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해 주는 책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철학의 궁극적인 의무라면 가장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정답을 제공하는 책이다. 철학자 김용규는 에둘러 말하기보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삶의 원리 몇 가지를 제공하고 있다. 여전히 갈등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나온 지혜를 빌릴 수도 있을 것이고 인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의 허무함이나 그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괴감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다.
책 속의 주인공 아리의 정식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다. 참 재미있는 이름이다. 선박왕 오나시스의 본명에 두 명의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리는 도움을 준 어느 랍비로부터 양피지 두루마리를 얻게 된다. 양피지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숨겨진 놀라운 내용이 적혀있다. 아리는 양피지에 적힌 대로 실천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벌게되고 원하는 여자를 얻게 된다.
윈스턴 처칠과의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은 물론 그레타 가르보와 마리아 칼라스, 그레이스 켈리, 재클린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그의 여성 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도대체 무일푼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그의 인생 역정은 영화나 드라마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그에게는 특별한 삶의 원리가 실제로 존재했고 그것을 실천해 옮겼다. 당연히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그 행동과 실천의 결과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성공한 실존 인물에 대한 자서전이 아니다. 저자 특유의 인문학적 지식과 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철저한 자료조사로 빚어낸 팩션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다.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문장과 치밀한 구성은 저자의 수고와 노력을 알 수 있게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의 목표를 세우지 못하는 사람에게 한 번쯤 권해 줄 수도 있는 책이다.
이 정도 노력과 공이 든 책이라면 자기 계발서든 성공담이든 읽어 줄 용의가 있다. 유독 돈벌이에 관한 혹은 자기 계발에 관한 책들이 잘 팔리는 대한민국이고 보면 특별히 그런 종류의 책을 싫어하는 내게도 문제가 있겠다. 이 책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좋은 책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양피지에 적힌 내용들은 너무 당연해서 하품이 나올만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오히려 설득력이 없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노력과 실천인데 실증적인 사례로 든 것이 바로 오나시의 삶이다. 그는 선한 의도로 얻었듯이 바닷가를 찾아온 사람에게 전하는데 그가 바로 빌 게이츠의 아버지다. 그런데 과연 세상이 노력과 실천만하면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다 줄까? 지극히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을까?
구조적 모순이나 문제점을 모두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되는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단한 노력과 열정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허탈감은 그래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력해도 안되는 일은 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 누구나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비애를 가르쳐 주는 책은 없을까?
아리는 분명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순수했던 소망보다는 세속적인 욕망으로 눈을 돌렸다. - P. 203
이 책이 자기모순에 빠진 대표적인 문장이다. 컨텍스트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문장만으로 문제를 지적하자는 게 아니다. 아리는 엄청난 부를 획득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겠다는 것이 순수한 ‘소망’이라면 세속적인 ‘욕망’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물에 반사되는 햇빛의 속성은 눈의 높낮이와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뿐이다.
어쨌든 캅베드에 적힌 내용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서점으로 달려가 중간 중간에 삽입된 황금색 바탕의 양피지 내용들을 읽어보고 판단하고 선택할 것을 권한다. 책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그렇게 살 것인가 말 것인가!
090317-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