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과 비오는 날 중 언제를 좋아하시나요? 누가 묻는다면 나는 비오는 날이라고 대답한다. 그건 날씨의 문제가 아니다. 정서의 문제이고 태도의 문제다. 날씨와 정서라니? 날씨와 삶의 태도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귀찮을 때 사람들은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비오는 날이 그냥 좋은 거다. rainy라는 아이디를 오랬동안 썼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뭐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비가 좋다는 정도. 굳이 찾으려면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과연 그러한 이유들 때문일까 싶기도 하고. 그녀를 만날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렸다. 이렇게 시작하는 연애 소설이 아니라, “말도 안 돼.”로 시작하는 말도 안 되는 소설이 <부코스키가 간다>라는 한재호의 장편 소설이다. 제 2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말도 안 돼’로 시작해서 말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모든 문학이 그러하듯이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해석되거나 혹은 의도적 오류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시대를 벗어난 소설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이 소설도 불안한 21세기의 한 복판을,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을 통렬하게 비꼬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은 시대를 거스를 수 없을 것처럼 강렬하다. 고용 없는 성장과 승자 독식의 시대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 시대의 괴물과 맞서 싸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싸움의 대상도 모호하고 자본의 그림자에 포섭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어느 시대에나 그렇듯이 움직이지 않는 다수와 발 빠르게 적응하게 살아남는 소수 그리고 이건 아니라고 외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이 소설의 주인공은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다. 소설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30대 소년’은 시대의 산물이다. 대학졸업 3년차, 예비군 6년차인 주인공의 일상은 이력서 쓰기와 웹서핑으로 요약된다. 무임금 노동이지만 시대를 견뎌내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하다. 개인이 손 쓸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늙은 소년의 이야기가 바로 <부코스키가 간다>의 화자다. 주인공으로 나선 부코스키는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며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모든 등장 인물을 이끈다. 보이지 않는 괴물이 보이는 실체로 등장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고 없는 대상을 구체적 인물로 등장 시킨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부코스키의 정체도 존재도 알 수 없고 그 의미는 점점 모호해지면 캐릭터는 흐려지고 사라진다. 적어도 내 안에서 부코스키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오롯이 청년 백수만 남았다. 소설을 통해 현실을 읽어내고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은 일견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소설의 재미는 거기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이 소설의 즐거움은 부코스키의 정체에 있다. 그가 비오는 날 아침 아홉시가 되면 어김없이 길을 나서는 이유 때문에 독자들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의 뒤를 밟는 주인공 백수 청년의 시선으로 그를 따라간다. 도대체 ‘왜’라는 호기심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종반으로 치달을수록 부코스키의 정체보다 화자인 청년백수에게 시선이 옮아간다. 그가 살아온 시간이나 살아갈 과정이 아니라 지금 현재 그가 겪고 있는 혹은 견뎌내고 있는 시간들이 바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대를 탓해 보아야 피해는 개인에게 남겨질 뿐이다. 구직행위는 힘겨운 무임금 노동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만 대가없이 시간만 흐른다. 이 소설이 치기어린 백수의 세상 도전기와 다른 이유는 우리 시대가 양산해 놓은 넘을 수 없는 벽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거나 게으르거나 목표와 희망이 없어서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청년백수가 견뎌야 하는 것은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 시대의 통증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새로운 세대와 시대로 넘어가기 위한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른이나 먹은 늙은 소년을 통해 성장통을 읽어야 하는 독자 또한 마음이 편치 않다. 추리 소설적 요소가 개입되어 스토리를 이끌어 가고 화자의 반복적 일상과 경쾌한 문장과 표현들은 흡입력있게 독자들을 끌어들이지만 장편으로 끌어가기에는 허약한 이야기와 ‘거북이’의 캐릭터가 모호하다. 쫓는 자에서 쫓기는 자로 설정된 상황은 흥미롭지만 끝내 그 연쇄적인 고리의 의미를 드러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가의 시작인 작품이니 많은 응원과 박수가 필요할 것 같다. 늘 그러하듯이 경쾌하고 가볍게 현실을 비틀고 웃음과 눈물을 비벼줄 수 있는 작품을 독자들은 항상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삶에 대한 질문들을 스스로 해결해 가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 있겠다. 정답은 없다. 다만 무언가를 쫓는 과정, 그 지난한 과정이 삶이 아닐까? 그러면서 무언가에 쫓기는 인생. 우리는 그 영원한 순환 고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시대를 넘어서 세월을 이겨내고 치열한 삶의 문제들을 풀어내는 과정은 결국 내 안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지도 모르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청년백수와 그 애인 그리고 놀이터에서 만난 민호와 부코스키는 모두 제 자리에서 그만큼의 무게를 짐 지고 있다.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소설가의 몫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무엇인가 쫓고 있다면, 아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야한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오늘은 안심이다. 부코스키도 별 일 없이 가게를 지키고 앉았을 테니까 말이다. 090314-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