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 비타 악티바 : 개념사 5
노명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평점 :
일시품절


  “아직도 나를 격동시키는 것은 오직 자유라는 말뿐이다.”(초현실주의 선언, 앙드레 브르통, 1924) - P. 84

  어디에도 길은 없었다. 처음부터 만들어진 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 사람, 두 사람 걷다보면 길이 된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닌 곳에 처음 발을 디디는 사람이다. 도전자, 개척자, 선구자로 명명되는 그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역사에서 영웅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어떤 사명감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수하게 내적인 욕망이 넘치거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라 믿는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이기적인 목적이라면 중간에 서 있으면 된다. 군대생활의 비법이라 전해지는 그것처럼.

  앞장 서는 사람은 외롭다. 때로는 혹독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며 미쳤다는 소리도 들어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항상 격려와 박수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몸은 편하고 정신도 고달프지 않다.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남들이 하던 대로. 그러면 최소한 중간은 가고 나에게 커다란 불이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걸 철이 든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했다고 표현하기도 하며 나이가 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긍정적 의미이든 부정적 의미이든 철들지 않는 게 나의 인생 목표 중 하나다. 나이 값 못하고 싶은 게 작은 바람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얄팍한 이기심과 눈앞에 이익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귀찮아서 혹은 몰라서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이기적인 목적이나 뻔히 들여다보이는 이유 때문이라면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을 물론 주변 사람들도 금방 안다. 모른 척 해도. 문제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방법과 태도가 확고한 신념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오르기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불행이다. 그것을 깨뜨리기 위한 연대와 실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혼자라도 나서 척후병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흔히 찾기 어렵다.

  시대를 앞서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진정한 아방가르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근대 예술 분야에서 나타난 유일한 흐름만이 아방가르드는 아닐 것이다. 도도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현실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미래를 향한 흐름을 읽어낸 사람들을 우리는 진정한 아방가르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전투의 선봉에 선 척후병을 이르는 말이었다. 미래의 예언자이며 후위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첨단의 위치에 선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아방가르드다. 예술사에서 전위부대가 등장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예술가들이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기에 등장한 자연스런 흐름이다. 패트런이나 궁정소속으로 신분 자체가 독립적이지 못한 예술가에게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끝없는 도전과 도발을 통해 기성 예술의 권위를 공격했고,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예술을 시도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과거의 예술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예술을 시도하고 보여줬으며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이 아방가르드다. 회의적 시선과 비판적 관점이 아방가르드의 조건이다. 전통을 거부하고 민첩하고 용감하게 그리고 대범하게 행동으로 옮긴 예술 행위를 우리는 아방가르드라고 부른다.

  노명우의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흐름과 예술사의 과거를 추억하는 책이다. 예술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인류의 역사가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였듯이 말이다. 미술관과 박물관에 박제된 예술에 대한 도전과 반항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궁정 예술과 후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예술은 어떠했을까? 책세상의 개념사 시리즈는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기획으로 좋은 책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미래파 선언, 초현실주의 선언 등 아방가르드의 도발이 시작된 것은 사회,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회적 배경이나 문화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화장실 변기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뒤샹을 누구 쳐다보기나 했겠는가? 이제 그 변기는 미술품 경매장에서 1700만 달러에 거래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지나간 역사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예술이다.

  더더욱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적 시도가 오히려 예술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드름을 피우거나 미술관 안에 박제된 예술에 대한 거부는 계속될 것이다. 다변화되는 사회에서 고정된 예술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자본에 포섭된다. 역설적으로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파괴로 명성을 얻은 예술품들이 이제는 가장 상업적인 미술품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의 산업시스템은 모든 예술품을 화폐로 환산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방가르드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아니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언제나 아방가르드는 있다. 실패와 성공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감내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동참할 준비를 해야한다. 한발 더 나아가 내가 아방가르드가 되어야 한다는 진취적인 생각과 행동이 세상을 조금 바꿀 수 있다. 나는, 아니 우리는 항상 그들이 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들이 전해주는 미래의 메시지를 기다린다. 아방가르드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0903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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