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대하는 용어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컨텍스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컨텍스트가 본래 의미를 훼손하는 경우에 있다. 빈번하게 사용하다 보면 본래 의미를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사람들에게도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언론이 한 몫을 제대로 한다. 지역 방언이 아니라 계층 방언처럼 비슷한 부류의 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나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이 새로운 은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와 조금 다르다. 이미 존재하는 학술적인 용어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의 용어를 아전인수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곡학아세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실용주의는 철학 용어다. 퍼스가 처음 사용했고 듀이가 미국의 교육과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후 언어분석철학의 물결로 쇠퇴했다가 로티에 의해 다시 주목 받는다. 실천적 유용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유사하다. 하지만 ‘프래그머티즘’이 나름의 원칙과 세계관을 가진 철학적 입장인데 비해 우리가 사용하는 실용주의는 특정한 태도를 말한다. 어떤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삼으면서 이념이나 원칙 같은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본다. 이쯤 되면 어디서 많이 듣던 흘러간 옛 노래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언론에서 혹은 특정 정치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실용주의가 사실은 철학적 개념인 ‘프래그머티즘’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짜 실용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을 주장했던 철학자들이 대한민국에서 주창되고 있는 실용주의를 듣는다면 까무라 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용주의적 태도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천적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공통분모도 있고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 적용대상과 범위에 대해서도 우리가 동의할 수 있을까? 이유선의 <실용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실용주의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표면적으로 실용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시의적절한 신문 시평(時評)처럼 읽힌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통탄할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혹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점잖게 타이르는 듯하다. 때로는 날선 비판의 목소리로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학문적 입장에서 철학사상을 오도하는 현실에 분노했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실용주의의 참모습을 알리고 싶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진다고 믿는다. 그것을 아는 것이 먼저라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추천할 만하다. 살림지식총서의 한계라면 제한된 분량과 피상적인 논의의 수준일 텐데 오히려 머리 아프고 복잡하지 않다는 장점을 지닌다. 말하자면 실용적인 ‘실용주의’ 책이다. 핵심을 짚고 흐름을 파악하는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개괄적인 수준에서 혹은 교양 수준에서 얄팍하다 싶겠지만 일반인들에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성이나 실용성 측면에서 뛰어나다. 실용주의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태동과 전개 과정을 살펴 본 다음 실용주의적 관점들을 소개하나.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실용주의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당연하지만 마지막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뼈에 사무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제도와 규범을 넘어서서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실용주의자가 꿈꾸는 다원주의 사회는 이런 상상력이 억압되지 않고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는 사회이다. - P. 19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개선시키는 것을 지식의 목표로 간주하는 실용주의자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진보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구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극복해 나가는 실천의 문제이다. - P. 49 좌와 우,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집어치우자. 모순된 말이지만 그리고 ‘실용주의’를 받아들이자. 위에서 언급한대로 제대로 된 실용주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나간다.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실용주의를 실천하자.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고 단순한 돈벌이를 위한 실용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실용주의를 실천하자.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현실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안에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우리가 창조해 낼 수 있는 삶의 모습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각자 소중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회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는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삶의 모습이다. 저자의 말이 실용주의라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헛된 꿈을 꾸는 이상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실용주의적 태도만으로 사람들의 삶을 유린하거나 왜곡된 개념으로 국민들을 호도하는 짓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워낭소리’를 “교육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 했던 것이 우리의 저력이 됐고 외국인도 이에 놀라고 있다”(한겨레신문, 기사등록 : 2009-02-15 오후 07:20:08 권태호기자)고 말하는 대통령이 특목고와 자사고 확대를 통해 교육 기회 불균형의 초석을 다지고 있다. 영어 광풍과 암묵적 고교 등급제, 편법 본고사의 부활을 조장, 묵인하는 실용주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그가 말하는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허리띠 졸라매고 ‘대한민국의 힘을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재벌의 광고 속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실용주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과거로 회귀하는 급행열차는 오늘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 가짜 실용주의자도 가라. 실용주의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실용주의자가 되자. 090215-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