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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너를 어루만지고 싶다. 부드럽고 따스하게 온몸으로 전달되는 너를 느끼고 싶다. 손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 기관이 동원되어 오감으로 너를 만난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어루만진다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상처를 위로한다는 뜻부터 성적인 의사를 전달하려는 의도까지. 우리말 특유의 어감과 뉘앙스를 알고 있는 모국어 사용자라면 어루만진다는 말이 편안한 안정감으로 전달될 것이다. 게다가 조용한 온기를 느끼게 하며 천천히 교감한다는 뜻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추상적인 감정이나 구체적인 행위를 한마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기막힌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무심코 스치는 말들 속에서 사랑을 찾아낸 고종석의 <어루만지다>는 독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저자의 말대로 사랑은 결국 위로이고, 배려이고, 무엇보다도 열정이니까 어루만짐은 곧 사랑을 의미한다. 1996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이 책의 부제가 된 사연이다. 속편처럼 쓰였지만 체제와 내용이 전혀 다른 책에 어울리는 적절한 제목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마흔 개의 단어가 나온다. 입술로 시작해서 주름으로 끝나는 사랑의 변주곡들이다. 모국어에서 길어 올린 사랑의 말들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말들이 대부분이다. 어원을 밝혀 그 언어의 기원을 찾아보고 옛 문헌을 뒤적이며 현재의 말과 비교를 통해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핀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말은 그 의미를 제 스스로 드러낸다. 사전적 의미를 곱씹고 관련 어휘들을 훑어보는 것도 적절해 보인다. 말 한마디로 시작해서 잘 차린 밥상처럼 우리말의 어휘들은 풍성하기만 하다.
하나의 단어로 시작해서 펼쳐지는 자유 연상과 저자의 경험과 단상들을 따라가는 일은 즐거운 산책과 같다. 작은 잘 짜인 한 편의 글들이 모여 전체 책을 이루는 구성은 단순한 병렬적 나열에 불과해 보이지만 유기적인 관계가 단단해서 잘 지은 집을 연상 시키는 책이다. 무신경한 듯 싶지만 내용들이 엮어내는 통일성과 ‘사랑’과 ‘말’이라는 두 개의 핵심어에 접근하는 방식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두드러진다.
각각의 글들은 주제어에 대한 단상에서 출발해서 앞서 말한대로 어원을 밝히고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현재적 의미를 반추한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경험한 혹은 깊이 생각한 내용과 연결되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느낌을 준다. 편안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의 깊이와 색깔이 담백하다. 작가 특유의 문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또 다시 고종석의 이야기에 흠뻑 빠질 만하다.
‘미끈하다’ 처럼 점액질의 어감을 드러내는 말 뿐만 아니라, ‘발가락’이라는 꼼지락거리는 관능, ‘밴대질’이라는 민망한 단어까지 속속들이 순우리말을 나열한다는 원칙을 지켜가며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글들은 일단 킬킬거리며 어깨에 힘을 빼고 읽을 수 있는 내용이어서 읽는 내내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속삭임’으로 다가오고 때로는 ‘한숨’을 내쉬기도 하며, ‘거품’을 물기도 하고 ‘그대’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순 우리말들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말에 대한 지식과 관심에 대해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아름답거나 혹은 생소한 말들이 펼쳐 보이는 풍성한 밥상은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 한 단어, 한 단어 갈고 닦아 빛이 나도록 만들어 놓은 작가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덕분에 우리는 어느 배우의 수상 소감처럼 밥숟가락만 들고 떠먹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누가 ‘사랑’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아니, 누구나 책 한 권씩은 쓸 만한 이야기 거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과학적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어루만지다>처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다양한 시선으로 ‘사랑’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충분히 즐겁고 훈훈하다.
조금은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만났다. 고종석의 책을 사서 크게 후회하는 일은 없다. 눈길을 끌기 위한 표지와 제목이 조금 못마땅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호기심을 가졌을 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알지 못했던 말에 대한 이야기도, 희미했던 내 사랑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도 쓰여 있다.
그래서 작가는 어루만진다는 말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한다.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다. - P. 233
09021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