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루지 -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
개리 마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갤리온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있는 유기체는 역사적 구조물이다. 곧 말 그대로 역사의 창조물이다. 이것은 공학 기술의 완벽한 산물이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잡동사니들을 이어 맞춘 것이다. - 프랑수아 제이콥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혼자 쓴 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고 위로해 보지만 별로 도움은 안 된다. 매끈하고 완벽한 신체로 진화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몸속에는 말도 안 되는 혹은 불필요한 또는 거추장스런 신체 기관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사회의 변화 속도와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 속도에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신체 기관이 그러한데 인간의 마음은 어떨까? 훨씬 더 하다. 그래서 가끔 엉뚱한 상상력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오류 투성이인 인간의 정신 영역을 대단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정교하고 고도로 발달된 철학적 사유와 과학적 판단을 하는 이성을 내세우지만 인간은 어쩌면 여전히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서도 쉽게 이겨내지 못하는 우리들 마음안의 바보들이 여전히 숨어 살고 있는 것이다. 뻔히 보이는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안에 숨어 사는 괴물 혹은 바보들을 찾는 데 일생을 보낸다. 개리 마커스의 <클루지>도 그렇게 탄생한 책이다.

  클루지kluge는 서투른 또는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 고장 나기 쉬운 애물단지 컴퓨터를 이르는 말이다. 인간의 신체 기관뿐만 아니라 기계 장치에도 사용되는 말이고 그것을 확대시켜 저자는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는 용어로 비유하고 있다. 그 용어나 개념이 인간의 심리 상태와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지 않고도 저자는 생각의 함정들을 잘 파헤쳤다.

  그 생각의 함정은 생각의 무기들이 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생각은 정해진 길과 올바른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전혀 엉뚱한 방향과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클루지를 단순하게 실수나 엉성한 대책으로 여길 수만은 없게 만든다. 그 마음의 갈피들을 잘 분석하고 쉽게 설명한 것이 바로 이 책의 미덕이다.

  맥락과 기억, 오염된 신념, 선택과 결정, 언어의 비밀, 위험한 행복, 심리적 붕괴로 나누어 마음안에 도사리고 있는 클루지들을 해부한다. 왜 그런지 그런 생각과 행동의 패턴들이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 원인과 결과를 밝히고 현상을 분석하는 예리한 눈은 높이 살만하다.

  심리학과 언어학 그리고 분자생물학을 전공했다는 저자의 글에는 학문적 통합을 통한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드러난다. 다양하고 해박한 관점들을 어떤 독자이든 공감대를 넓고 깊게 형성한다. 동의할 수 없는 억지 주장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사례와 문장들은 이 책이 넓은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주변에 흔히 발견되는 수많은 심리 관련 서적들 중에 특별한 책을 고르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책은 아주 잘 쓰여진 심리학 서적으로 추천할 만하다.

  자신의 이론과 주장 속에 함몰되어 있지 않고 진화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버스를 비롯해서 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 등 다른 저자들의 연구 결과를 비교 검토하고 인용하여 객관성과 합리적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들이 엿보인다. 분야별로 간략하게 다듬고 쉽게 풀어내는 과정에서 정밀한 서술이나 풍부한 연구 성과들이 생략될 것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되어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진화는 우리에게 상이한 능력을 지닌 두 체계를 남겨 주었다. 하나는 틀에 박힌 일을 처리할 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반사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틀을 벗어나 생각할 때 유익한 숙고 체계다.
  우리가 이 두 체계의 장단점을 인식하고 조화를 꾀할 때, 우리의 결정이 편향되기 쉬운 상황들을 밝혀내고 이런 편향을 극복할 전략을 마련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지혜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 P. 149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개념 하나가 반사 체계와 숙고 체계이다. 모순 된 두 사고 체계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인간의 판단 능력을 증진시켰다. 지혜롭다는 말은 두 개의 사고체계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졌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 인식의 틀을 바꾸고 발전시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판단 능력과 사고 능력을 증진시킨다는 말이다. 합리와 이성만이 인간의 특징은 아니지만 보다 정확하고 지적인 사고 능력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클루지를 알고, 인정하고 적절하게 활용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식은 개선을 향한 첫 걸음이다. 우리의 어설픈 본성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수록 우리는 그것의 개선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P. 261

  눈에 보이는 클루지를 어쩌지 못하는 것 또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인간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쉽게 굴복하지 말고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또 다른 자아를 인정하기 위해서도 클루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마다 반사 체계와 숙고 체계가 충돌을 일으킨다. 우리 모두는 클루지의 노예인지, 숙고 체계의 하인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는 것은 행동하느니만 못하다는 당연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클루지를 알았다면 이제 판단과 행동에 분명한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저자의 분석이 유용한 까닭이다.


08123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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