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앗싸, 가오리!”가 떠올랐다. 에쿠니 가오리의 이름을 보고 처음에 ‘쿡’하고 웃었던 것 같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인상 깊게 보았다. 원작자가 에쿠니 가오리라는 걸 알았지만 찾아 읽고 싶지는 않았다. 한때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거부 전부 찾아 읽었으나 이후 일본 작가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가끔 나쓰메 소세키나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찾아 읽지만 요시모토 바나나 유의 책들에 몰입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정서의 샘에 물이 고이지 않나보다. 아니면, 세월과 나이를 탓할 수밖에.

  어쨌든 간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낙하하는 저녁>을 읽었다. ‘실연을 담은 소설’이라는 부제는 결말을 알고 시작하는 추리소설처럼 흥미를 떨어뜨리지만 이런 유의 소설은 마음의 갈피들과 섬세함으로 승부를 건다는 걸 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실연의 아픔을 겪었을 것이고 감정은 이입되기 마련이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건 유사한 상황이나 감정들을 일반화 시킬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람들은 나에게 책을 선물하지 않는다. 특별히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가끔 아쉬울 때도 있다. 손에 책을 놓지 않기 때문인지 몰라도 정말 오랜만에 선물받은 책이다. 내용이야 어떠하든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먼저 읽혔다. 선물하는 책은 둘 중 하나다.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거나 선물 받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거나. 이 책은 전자에 해당된다. 휴일에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잠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실연했다면 더더욱.

  사랑은 두 사람이 하지만 이별은 혼자서 한다. 쌍방향과 일방향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안을 야기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연인 관계가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가능한 일이지만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경험적으로 혹은 주변에서 흔히 발견하는 과정과 결과들을 통해 인간의 마음도 학습을 하게 된다.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고 상처나 치유의 과정을 반복하기도 한다. 조작적 기억은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만큼의 러브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모든 사랑은 유일무이하다. 이 소설의 나레이터 리카는 연인이었던 다케오와 이별하는 데 참 많은 시간이 걸린다. 8년간의 연애가 3일 만에 끝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리카는 어쩌면 지나간 시간들을 정리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한 부분을 누구에게 떼어 준 것은 아니지만 다케오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의 깊이나 농도는 측정할 수 없다. 다만 유추의 방식을 통해 타인의 사랑과 나의 감정들을 비교할 수는 있겠다. 이 소설은 모든 독자들의 사랑과 이별할 수 있는 바로미터의 역할은 할 수 있겠지만 이별하는 방법이나 정리하는 기술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저 이별하는 하나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하니 더더욱 가슴 아플 수밖에.

  누구나 자신의 아픔과 상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생각하며 이별의 고통을 견뎌내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드러내는 방식과 숨기는 방식의 차이로 고통과 생채기의 크기를 측정할 수는 없다. 연인의 연인과 동거라는 특별한 상황을 연출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욱 비극적이지 않다. 모든 상황은 상황일 뿐이며 감정은 감정일 뿐이고 시간은 모든 것들을 변화 시킨다. 시니컬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랑 얘기는 하품을 유발하거나 따분한 신문보다 지루하다.

다케오와의 만남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하고 비슷하다. - P. 67

  소설의 내용과 무관하게 눈에 들어오는 몇 개의 문장들. 하늘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이 겹쳐진다. 하늘만큼 좋아하다니,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무수한 풀벌레 소리, 그렇게 세상은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다. 내 인생의 바깥쪽에서. - P. 71

  군대에서 처음 느껴 본 감정이다. 세상에서 내가 사라졌는데도 세상은 어김없이, 그것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도 돌아가고 있었다.

돌아갈 장소가 없었어. - P. 160

  간혹 예외는 있지만 돌아갈 장소, 돌아갈 사람이 없어져 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이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거야.”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런 거야.” - P. 177


  안과 밖의 경계, 눈에 보이지 않는 금 넘어가기.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돌덩이와 같은 것이다. 나이와 무관하게 성숙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영혼의 고통을 동반한다. 당연한 말인가?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언제였던가 절망적인 진실을 얘기했던 하나코가 떠올랐다. - P. 190

  사람들은 스스로 믿고 스스로를 배반한다. 그러면서 타인을 원망하며 스스로는 반드시 피해자가 된다. 정혜신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배신은 착각 혹은 의존적 심리현상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소설의 결말은 짐작대로다.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길고 지루한 시간들. 물론 본인에게 죽음 같은 고통이겠으나 리카는 비명 지르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죽음은 오히려 예기치 못한 곳에 찾아온다. 비현실적이서 현실에 발붙이고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


081228-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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