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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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민한 철학자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서정시인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준다. 서정시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여전히 서정시는 건재하다. 아니 더 이상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는 계속 팔리고 읽히고 있다. 그것이 지적 허영과 자기 충족에 기인하든 흘러간 혹은 철지난 유행가처럼 소비되든 무관하게 시는 여전히 쓰여지고 있으며 팔리고 있고 읽히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니겠는가.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매력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슬픔이 없다니? 그것도 십오 초? 저절로 손이 간다. 책장을 더듬고 어루만지다가 한 편씩 읽어 나간다. 음미하듯 천천히. 때론 빠른 호흡으로 넘기기도 하고, 때론 중간에 멈춰 긴 숨을 내뱉기도 한다. 어느 시집이든 그러하겠으나 여유와 안정이 없다면 시는 읽히지 않는다.

  심보선의 시는 익수하지만 생경하다. 인간의 감정이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법이니 시에 담아낸 정서가 익숙하다는 말은 하나마나 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진부해지기 쉬운 법. 조심할 것은 시인뿐이 아니다. 편안한 감상과 한 방울의 눈물을 원한다면 멜로드라마를 찾아 볼 일이다. 시를 통해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비극과 절망이다. 희망과 기쁨은 그것을 둘러싼 후광처럼 자연스럽게 빛을 발한다.

  그러 면에서 심보선의 시는 메마름과 극단적인 슬픔이 주는 간절함이 없다. 그래야 좋은 시라는 말과는 다르지만 개인적인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정호승의 <새벽편지>나 <서울의 예수>는 이제 더 이상 울림을 전하지는 않는다. 오래 전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전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 ‘슬픔의 진화’ 중에서

  서시에 해당하는 ‘슬픔의 진화’ 중 일부다. 낯설게 하기와 새로운 시야의 확보는 시인의 전매특허이리라. 밤새 고심한 결과가 독자에게 닿지 않는 것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 독자를 위해 시를 쓰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야 할 말이 없어지겠지만 생경한 시선 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시절이 벌써 당도해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 ‘오늘 나는’ 중에서


  차라리, 철저하게 진부한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말은 무겁고 끈적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다. 누구나 하루치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지만 그 안에 담긴 문법들은 제각각이다. 상대적인 시간의 양과 담아내지 못한 슬픔들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하루의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비극과 증오는 무기가 될 수 없다.

  오늘 나는 누구의 얼굴을 노려보았나? 오늘 나는 누구를 사랑했나?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중에서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에서

  순간을, 아주 잠깐에 대해 말하는 시를 우리는 자주 발견한다. 그것은 찰나의 인상이 주는 기쁨이자 행복이다.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과 그만큼 짙은 향기를 담보하기도 한다. 생에 대한 미련도 없고 슬픔도 없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천국이라고 말하는 곳에는 미련도 슬픔도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존재하다가 사라지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 사라진 자리에는 흔적조차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말이다. 비어가는,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응시해 보자. 과연 누가 생의 슬픔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를.

구름이 내게 모호함을 가르치고 떠났다
가난과 허기가 정말 그런 뜻이었나?
- ‘착각’ 중에서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 ‘전락’ 중에서

  끊임없이 욕망을 부정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도약을 꿈꿔본 적 없는 인간이 있을까. 평면에서 옮겨지든 입체에서 평면으로 옮겨지든 그것은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것을 ‘전락’이라고 말하지만 시에서는 ‘공허’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법이다. 가난과 허기라니. 사랑과 슬픔처럼 동어반복으로 들리는 말이다.

  피와 눈물에 대해 그리고 생활과 심연에 대해, 그 바닥에 대해 한참 들여다 보고 있는 시인의 시들은 커다란 울림보다 작은 메아리에 머물고 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현실 밖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영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도약을 꿈꾸어도 현실을 부정해도 흔들림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구름처럼 모호하게. 그 소리는 이명처럼 들리다가 들리지 않다가,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그렇게 사라진다. 모든 것이.


081216-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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