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일상 창비시선 294
백무산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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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점심 식사 후 나른한 5교시. 절인 배추처럼 늘어진 아이들에게 한문 선생님은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으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읽어주시는 시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흘러 친구들이 볼까봐 얼른 닦았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사회에 막 눈을 뜰 무렵 박노해와 백무산은 노동문학의 선두주자였고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은 시대를 반영하는 기념비였다. 80년대의 뜨거움이 사라졌지만 시간 속에 모든 것이 묻혀 버리는 것은 아니다.

  백무산의 시를 참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프로필 사진 속 시인의 모습은 세월을 웅변한다.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시인이며 시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다양한 시의 색깔들만큼 시대가 변했고 세월이 흘렀나보다.

내게도 벌써 여러 봄과
여러 겨울이 지났네
지난 계절들 내 손으로 다 거두어온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나의 낯선 생이 바람 속
빈 둥지처럼 나뒹굴고 있네
나는 지나온 나의 전부가 아니네

내 온몸이 통과해왔건만 낯선 생이
불쑥 낯익은 바람에 타인의 것인 양 흩어지고 있네

나는 그걸 하나의 생이라고 우겨왔네
저기 다른 생이 또 하나 밀려오네
- ‘생의 다른 생’ 중에서


  <거대한 일상>의 서시에 해당하는 시의 일부다. 또 하나의 생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후반생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시대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선 개인의 슬픔을 드러내기도 하는 일이다. 낯선 생이 낯익은 바람에 흩어지는 모습은 처연하다. 누가 누구의 생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시간 앞에 모든 생은 겸허해 지고 한 시대의 끝자락에서 지난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허망할 뿐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꿈을 꾼다. 꿈꾸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그것은 시인이든 아니든 어느 시대를 살고 있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인은 꿈을 꾸지 않으면 절망도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는 듯하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마음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비구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순결한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
- ‘기대와 기댈 곳’ 중에서


  삶의 일상성은 불온한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이 시대를 무어라 정의할 수 없지만 시인에게는 여전히 세계는 불안한 곳이고 부조리한 상태다. 그러한 인식은 부정적 세계관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깨어있는 의식을 대변한다. 폭압적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전쟁과 기아에 허덕인다. 그 침략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고 이웃들의 굶주림과 가난을 외면한다. 생존 경쟁을 넘어 개인주의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쓸쓸하기만 하다.

  누군가를 쏘아야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총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총을 뺐기지 않으려면 쏘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정의의 이름으로 쏘는 것은 불가능하다. ‘쏘다’가 정의라는 역설적 인식은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우리들의 아픈 자화상이다.

전쟁 때문에 군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있으므로 전쟁을 생각하는 것이다
총을 든 자에게는
‘쏘다’와 ‘정의’는 언제나 같은 말이다

세상의 어떤 침략전쟁도
정의의 전쟁이 아닌 것이 없고
성전(聖戰)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정의의 ‘쏘다’는 없다
‘쏘다’가 정의인 것이다
- ‘‘쏘다’가 정의다’ 중에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왔노라고 노래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가 승리하고 있다
- ‘위인전’ 중에서

  시대가 변했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며 노인은 죽는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승리하는 시대는 계속된다. 역사는 순환하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일까? 오욕의 세월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혹은 절망적이고 처절한 시대의 노래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이 시대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희망이 시작되는 것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과 장밋빛 미래에 대한 그들만의 축제를 구경하는 방관자가 되어야 하는지.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는 온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이든. 다만 우리는 그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그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야 최소한 ‘순결한 분노’를 느끼지 않겠는가. 분노가 없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좋은 게 좋은 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사람에게 분노는 필요 없다.

  시인이 말하는 분노는 사회적 명상을 말한다. 기사(騎士)는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내가 아니 당신이 기사일 지도 모른다. 기다림에 앞서 순결한 분노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거울을 보고 바로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얼굴 표정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일을 통해 그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지 말이다.


순결한 분노

꿈을 꾸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책을 읽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고요에 드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노동을 하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소유 욕망의 성냄이 아니다
탐욕에 치미는 화가 아니다

순결한 분노는 사회적 명상이다

이제,
그들이 온다

기사(騎士)들이 온다



081128-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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