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하라. 네가 살아 있다면 그 무엇이든 사랑을 하라.” …… “서로의 심장을 꺼내놓고 싸우고 나면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될 테니까. 역사책이란 그런 사람들의 심장에서 뿜어난 피로 쓴 책이야.” - P. 25

  불가해한 인생을 소설로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 그 허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현실이며 매트릭스이고 심리적 실재인지도 모른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허구를 만나는 일은 그래서 불편하다. 현실을 허구로 만들고 공허한 이야기가 오히려 세계와 유사하다. 특히 역사적 사실은 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시간의 씨줄과 공간의 날줄이 만나 사실적 세계를 만든다. 역사와 소설이 만나면 완벽한 상상적 허구의 세계가 되거나 보이지 않는 진실의 세계를 더듬어보거나 당대에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이 읽을 만한 것이 되려면 단순하게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재미있거나 진실을 건드리거나. 두 가지가 결합된 책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인생을 통찰하고 역사를 이해하며 삶의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독자들은 더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개인적 취향이나 입맛에 따라 기호가 나뉘기도 하고 그 재미라는 것도 사실 기준과 성격이 모호하기는 하다. 어쨌든 ‘진실’에 관한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그것이 개인의 진실이든 역사적 진실이든 말이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바에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소설은 감수성의 표현이 탁월하고 문장이 생생하다. 구석구석 감정의 말초를 건드리고 사실을 드러내는 방법이 정확하고 세심하다. 특히 사적인 영역의 감정이나 상황에 부딪힌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나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필요한 미덕이겠으나 김연수의 그것은 잘 벼려진 칼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벤다. 그래서 서늘하고 시린 느낌이다. 나는 그 발랄함과 경쾌함 혹은 어눌하고 찌질한 감상의 편린들이 마음에 든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작년에 나온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확연하게 다른 이 소설이 1년 만에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 후기에서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고민과 고통이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읽는 동안 짐작할 수 있었다. 1930년 만주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물지 않은 근대사의 상처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민생단이라고 하는 생경한 이야기를 들춰내는 것은 역사가의 몫으로만 돌리기에 감춰진 아픔이 너무 크다. 아직도 진행형인 분단의 역사와 좌우 이념 갈등은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숙제다. 어떤 소설가든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적어도 한반도의 문제를 인식한 작가라면.

  그 문제는 분단이나 식민 통치 혹은 한국전쟁이나 4.19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고 애정이다. 과거는 단순히 현재의 기억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작가에게 짐을 지워 주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읽고 싶은 혹은 읽어야할 소설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런 종류의 소설들이 반드시 쓰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아니 나의 지금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어제가 없는 오늘은 없다.

  1932년 9월 용정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1933년 4월 팔가자를 거쳐 7월 어랑촌 그리고 41년 8월 다시 용정에서 끝난다. 중국공산당과 일본 제국주의 사이에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불안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처절한 사상투쟁이나 눈에 보이는 뚜렷한 적에 대한 분노보다 비참한 것은 불신이며 불안이다. 이 소설은 그 불안의 정체를 말하고 있다. 자신들조차 자신들의 정체를 몰랐던 그들은 아직도 역사의 그늘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를지도 모른다.

  희망과 비극이 교차했던 간도. 그곳에 살았던 네 명의 중학생과 화자인 김해연은 이 소설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다.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보다 오히려 당대의 삶을 가장 치열하게 보여줄 수 있는 주변 인물들이다. 누가 그런 시대를 만들어 냈는지 시대의 진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작가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말하려 했든 나는 이 소설에서 오래된 기억과 현재의 아픔을 함께 읽었다. 희미한 등불처럼 저기 멀리서 비추는 작은 빛의 알갱이들이 모여 현재를 만들어냈다. 나는 지금을 살고 있고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과거를 살았지만 보이지 않는유리 큐브에 갇힌 진실의 미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하나의 세계를 완벽하게 믿고 싶어한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부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 P. 42

  이 소설의 그 부끄러움의 세계를 조금 보여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김해연에게 그리고 이정희에게 사랑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사랑과 죽음은 과연 어떤 것인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하나의 세계와 그 곳의 사랑과 죽음.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 P. 325


0811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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