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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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적자생존의 논리는 인간의 유전자에 내면화 되어 있는 것일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방법일 지도 모른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이 생존의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로 사회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나 오래된 일일까? 아니 어쩌면 지금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는 보다 더 낳은 삶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경쟁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물질과 문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무한 경쟁 체제에 온몸을 내맡긴 채 끝없는 욕망을 재생산한다.

  삶의 목적과 방법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사회마다 시대적 가치가 있고 거대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주류의 흐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방법도 있고 <꽃들에게 희망을>을 준다고 믿는 애벌레처럼 끝없이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경쟁에 뛰어드는 삶도 있다. 우리는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그 흐름과 방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과연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신안1리 마을 이장 강수돌이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최근에 생각의 나무에서 問라이브러리 시리즈 5권으로 펴낸 책부터 손에 집힌다. 짧은 분량에 많은 내용을 함의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웠지만 제목부터 강렬하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강수돌 교수의 이전 책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목의 의미를 고민해 본다. 어렵지 않게 답이 찾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만을 확인하는 책읽기를 고집할 수도 없다. 읽기도 전에 책의 내용을 짐작한다는 것 또한 건방지지만 말이다.

  끊임없는 경쟁으로 얼룩진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쓰여진 이 책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우리들의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중독 벗어나기>에서 보여주었던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에서 출발한다. 자아실현을 일에서 찾고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논리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만 과연 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보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고, 버트런드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이야기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근대화 사회로 이행과정에서 게으름은 악이고 근면은 선이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세를 외쳤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전체의 파이를 키워 함께 나눠 먹자는 달콤한 유혹은 계속되지만 신자유주의 물결 이후 양극화는 심화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가정에서 발원한 부모들의 교육 방식과 대학의 서열화 사교육을 통한 무한 경쟁 체제는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이 유효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80은 20에게 지배당하고 교묘한 논리로 정당화된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명문 대학에 입학 하는 순간, 대기업에 취업하는 순간, 고시에 합격하는 순간, 강남에 아파트를 구입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경쟁의 덧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을 내면화하기 위해 이제 지자체와 국가가 앞장선다. 초등학생을 한 줄로 세우기 위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일제고사의 망령은 다시 부활했다. 가진 자를 위한 국제중, 특목고는 확산되고 건설과 토목만이 살길이라는 믿음은 여전하다. 삶과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일과 직업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사치에 불과한가.

  이른바 ‘팔꿈치 사회’라는 섬뜩한 표현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자기소외가 시작되는 경쟁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소통과 연대가 대안이 된다는 저자의 주장을 도대체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때때로 책장을 덮고도 막막해진다. 실천적 대한이 아니라 한낱 이상적 주장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속도로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우리는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

  저자가 주장하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 열 가지’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결국 경쟁은 학교에서 내면화되고 가정에서 공고화된다. 혹자는 학교의 실정을 잘 모르는, 학부모의 요구를 잘 모로는, 무한 경쟁시대에 큰 일 날수 있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에 무엇을 배우러 가는지.

  첫째,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한 삶이란 것을 일관되게 가르치지 않는다.
  둘째, 대학이란 그 자체로 공부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큰 공부(大學)’를 시작하는 곳이라는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셋째, 우리 사회가 ‘상중하’라는 사다리 질서로 되어 있고,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깨 놓고 보면 결국은 상층부로 진입하여 기득권을 많이 차지하려는 것이라는, 삶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넷째, 학교와 부모는 아이들이 ‘인재’가 되고 ‘영재’가 되고 ‘천재’가 되는 것을 바라지만, 이런 인재, 영재, 천재와 같은 말들이 결국은 아이들을 삶의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써먹기 좋은 자원, 즉 수단으로 보는, 잘못된 철학에 기초해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섯째, 초중고에서 수백 번 반복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만, 진정으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 몸과 마을 바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여섯째, 초중고 학생들도 단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뜻에서 미숙한 학생이 아니라, ‘나날이 자라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가르치지 않는다.
  일곱째, 각종 시험에 대해 무조건 잘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실상 이런 시험문제야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잊어버릴 것이고 나아가 참된 삶에 별로 필요도 없는 허황된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덟째, 입시 경쟁이 결국은 기업들이 써먹기 위한 노동력 경쟁으로 연결되고, 노동력 경쟁은 결국 상품 경쟁, 생존 경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아홉째,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에 대해 친절하고 우애와 환대의 정신을 갖는 것이 교과서 내용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학교는 일관성 있게 가르치지 않는다.
  열 번째, 개인적으로 정직하고 우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넘어, 사회질서 자체가 더 이상 사다리 질서가 아니라 ‘원탁형 질서’로 되어야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 없는 사회>의 저자 이반 일리히를 직접 만났던 저자의 경험담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 앙드레 고르와 도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오래 기억될 만하다. 특히 나비처럼 날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일이기 때문에 ‘경쟁’과 무관하게 진한 감동을 남긴다.

  나를 알고 싶다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국가를 보면 된다. 통시적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조망하면 우리는 씨줄과 날줄로 얽힌 거미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자포자기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저자처럼 연대지향적 사회의 밑그림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것인가. 이제 우정과 환대의 사회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08101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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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07: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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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2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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