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나는 시인들의 나이듦을 통해 내 나이를 확인하고 세월을 절감한다. 가끔씩 그들의 사진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확인한다. 나도 그렇게 변해갈 것이다. 눈에 보이는 나이가 아니라 시를 통해 확인되는 변화의 흐름은 가슴이 아리도록 슬프기도 하고 때로 낄낄거리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1978)를 대하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를 거쳐, <詩를 찾아서>(2001)을 다시 꺼내 뒤적여 본다. 책꽂이에 먼지가 쌓여가고 시인은 나이를 먹는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다가 웃었다. 편안하고 친근한 구절들은 결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 않지만 그만한 연륜과 여유는 또 젊은 시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날카롭고 첨예한 감각만큼 중요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제 내 나이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다면 지나치게 주관적 판단일까 모르겠다.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진경 속에서 길어 올린 맑은 시들이 언제나 그의 시를 기다리게 했다. 다작은 아니지만 나올 때마다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시에 흠뻑 취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올해 읽은 최고의 시집으로 주저없이 이 시집을 꼽겠다. 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서시의 힘은 강렬하다. ‘희망’이 무엇인지 간결하게 말한다. 희망은 원하는 자의 눈에서나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눈 속에 주관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희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희망은 별이다. 별은 어둠 속에서만 빛나며 찾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존재이다. 살아가면서 그 별은 눈에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을날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이 시를 읽고 내가 철렁했다.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은 불편하다. 오규원이 그랬고 이청준도 그랬다. 세월의 흐름 속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것을 예견하거나 스스로를 돌아보기만 하는 시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서글픈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시로 읽혔다. 이 가을에 코스모스 그림자가 길어지면 예사롭게 보이지 않겠다. 벌써 피어있을 코스모스를 보지도 못하고 가을을 보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 하루가 다르게 찬바람이 분다. 또 하늘빛이 달라졌다. 해골 저 몸서리치는 캄캄한 눈구멍이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한때는 저 눈에 별이 빛났으리 가슴이 철렁했다가 이제는 아득해지는 법이다. 시간의 풍화작용. 우리는 언젠가 무화無化된다. 존재는 소멸하고 마는 법이다.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 육신의 허망함이여.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지 말고 허허로운 눈빛으로 한 세상을 짊어지고 가자. 거기 그렇게 놓여있는 채로. 누구나 해골이 되어 만난다. 허무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미래에 대한 후일담으로 읽었다. 한 때는 모든 사람의 눈에도 별이 빛났으리라. 살아있는 지금도 눈에 별 하나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도 우리는 저 험한 정글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희망공부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그래도 희망공부를 멈출 수는 없다. 여전히 시는 희망이며 시를 쓰고 읽는 일은 희망공부와 다름없다. 어두운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별처럼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법이다. 이 세상을 비춰줄 마지막 불빛은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 잠시도 쉬지 말고 게으르고 누추한 곳에서 벗어나 희망을 비춰줘야 한다. 그 희망이 때로는 먼 미래의 시간일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랑일 수도 있겠다. 까만 밤하늘에 오늘도 별이 빛나는 이유는 아득한 그리움 때문이거나 보이지 않는 희망에게 기대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은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줄 어둠에게 속삭여 본다. 작은 희망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어 밤하늘의 별이 되고 은하수가 될 것이라고. 산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산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산이 아닌 것처럼. 그냥 거기 있는 사람은 영원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뭉스런 몸짓을 하는 것은 시인의 넉살이거나 정교한 희망이거나. 주위를 둘러봐도 산은 보이지 않고 그저 야트막한 능선들이 이어져 있다면 또, 그 아니 즐거운가. 산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놓일 것이 없으므로. 080925-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