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반하다 - 자기성공을 이룬 나르키소스 12인
안병찬.안이영노 지음 / 도요새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안치환이 불러 유명해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정호승의 시이다. 잠언 형태의 구절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시인은 이 시에서 외로움을 말했다. 그러나, ‘수선화’라는 꽃을 통해 외로움의 정서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했는지는 의문이다. 수선화의 학명은 Narcissus.

  도도한 자기애(自己愛)로 인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나르키소스의 운명은 외로움과 조금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는 나르시즘의 어원이 되기도 한 이 신화 속의 주인공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에코를 외면한 죄로 네메시스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지만 결국 나르키소스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사랑에 빠져 보지 못했다. 신화의 내용에 따르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불행의 시작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나르시즘은 자신감의 상징이며 경쟁력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채 타인을 사랑하게 되면 맹목과 집착이 되고 그가 없으면 자신의 존재는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만 키우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나르키소스는 과연 누구일까? 쉽게 말할 수 없을 수도 있고 너무 많아 헤아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언론인이자 언론학자 안병찬과 그의 아들 안이영노는 그들을 찾아 나섰고 그들을 만났으며 만나고 돌아와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물이 <나에게 반하다>라는 책으로 태어났다.

  이 책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몇 가지 특별함을 갖고 있다. 안이영노가 세운 문화기획자들의 모임 ‘기분좋은 QX'에서 기획하고 80세 청년 안병찬의 인터뷰로 진행된 프로젝트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아들 안이영노와 후일담을 나누며 인물들을 다시 분석한다. 그 과정과 책이 나오는 과정이 하나의 놀이처럼 유쾌해 보인다. 힘겹고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인터뷰를 준비하는 저자와 그들을 묶어내는 일들이 즐거움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색다른 작업이 가능한 것은 안병찬의 에너지와 열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나이를 무색케 하는 그의 추동력은 삶에 대한 열정과 나르시즘 때문은 아닐까?

  아들의 취재 명령에 아버지가 현장을 뛰는 형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책 제목처럼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에 소개된 열 두 명의 나르키소스는 다양하다. 스물 여섯 살의 아가씨 이꽃별, 지천명의 나이가 넘어서 예술가의 길에 전부를 건 씨킴, 세상을 누비는 1인 프로덕션 김진혁,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섰던 백지연, 가수협회 회원인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두언, 우리를 즐겁게 했던 야동 순재 등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가진 끼와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종횡무진 시대를 질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인터뷰어에게는 더없이 행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치밀한 준비와 꼼꼼한 분석이 뒷받침되어 인터뷰를 했겠지만 다만 아쉬운 것은 분량의 소략함이다. 지나치게 요약하고 대강의 인상만을 적었으니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크다. 분량과 형식의 제약이 선행되는 신문매체의 특성을 잘 알지만 책으로 묶어낼 때는 후일담이나 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아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열 두 명의 초상에서 나르키소스를 읽어내고 그것을 세상과 예술 혹은 타인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키는 모습들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든 아니든 그들의 인생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주자로 나선 안병찬이다. 스스로를 나르키소스 열 두 명 중 한 명으로 포함시킨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책의 주제를 강변하고 있다.

  사람을 읽어내는 것은 세상의 어떤 텍스트보다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 한 권이 지니는 소중함이나 책 자체의 의미보다 나는 이 책을 만들어 낸 과정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색다른 열정과 실험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 모두 나르키소스가 되어 미칠 듯이 자신을 사랑하고 여세를 몰아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을 살아나갈 힘을 얻어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0809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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