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
김영민 지음 / 늘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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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분이 지나고 나면 해가 길다. 특히 하지 부근의 저녁 어스름은 글자 그대로의 ‘산책’을 하기에 맞춤한 시간이다. 길 건너 편 중앙공원에 들어서면 산길을 절개해서 도로를 만들고 도심의 숲을 고립시킨 작위적 공원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을 중심에 두고 사방은 빽빽한 아파트 숲이다. 나무의 숲과 고층 빌딩의 숲은 서로를 원망하며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도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도심의 공원들은 인공의 섬이 되거나 본래의 모습을 잃고 길 잃은 아이처럼 콘크리트 숲 속을 서성인다. 그 산길 구석구석을 개미처럼 걷는 사람들, 작은 호수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을 타는 꼬맹이들과 마주하는 일상은 흔히 볼 수 있는 도심의 생활이다.

  현대 사회에서 ‘산책’이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계층은 그리 많지 않다. 일선에서 은퇴한 노인 계층이 아니라면 하루하루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어디서 걸을 것인가? 어디를 향해 누구와 걸을 것인가? 목적 없이 홀로 걷는 여유로움은 자본주의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치이다. 붕어빵처럼 비슷한 가족의 모습으로 주말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속에 서성이다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은 공식화 되어 있고 여가를 즐기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습득하게 된다. 독서 후에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사색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산책과 적당한 대화가 가능한 노을 지는 저녁 어스름은 과연 사치인가?

  철학자 김영민은 산책을 ‘전일화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해서만 성립하는 어떤 태도와 실천’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산책’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동무와 연인>을 읽고 탄력 받아 주문한 책이 바로 <산책과 자본주의>이다. 이 책은 문화비평서이다. ‘문화비평은 역사학과 사회학이 겹치는 그 첨단의 지점에서부터 오히려 삶의 조직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려는 감수성’이라고 정의하는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 본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2004)라는 근사한 제목의 책도 구미가 당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영민의 문장들을 신문의 칼럼이나 짧은 글들로 만나왔다. 긴호흡으로 읽어가는 맛은 확실히 다르다. 내게는 사유의 물꼬를 트여줬고 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즐거움을 전해주었다.

  짧은 글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는 구성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짧은 글들이 모여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만 독자는 하나의 큰 흐름을 짚어 내거나 저자의 말하기 방식을 통해 소통하게 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청계천이나 명절, 핸드폰, 비만, 전두환, 5.18, 인문학, 표절, 사랑, 혼인 등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사를 통한 문화 비평이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다. 숱한 사상가들을 인용하고 그들의 핵심 개념들을 통해 대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은 낯설지만 통쾌하다.

  대단히 직관적인 사물과 상황에 대한 인식 태도를 보여 주기 때문에 은유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직설적이고 차분한 논리로 그것들을 해체하고 분류하며 기저의 흐름을 꿰뚫어 분석을 시도한다. 대체로 통쾌하고 유쾌한 느낌의 문장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지나치게 매끈하며 지나치게 관념에 기대고 있기도 하지만 논리적이다.

  가벼운 문화 비평서로 읽히지만 뒷맛은 진한 에스프레소를 닮았다. 비평의 조건에 해당되는 여건도 안되는 건 아닌가? 우리의 삶이 말이다. 산책조차 불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불성설일지도 모르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철학적 인간과 일상적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사유의 힘과 능력이 현실에서 발현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분노는 긍정적인가?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과 선택의 방식들에 고뇌하는 영혼의 그림자를 밟으며 오늘도 산책하고 싶은 욕망만은 통제 불가능이다.

  하버마스의 말대로 ‘의사소토의 구조가 뒤틀린 탓에 생화세계가 식민화되었다’.  혁명이 배신당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애는 온몸으로 거부하기 힘들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시대인 것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때때로 가슴 속의 쌓인 넋두리와 울분을 토해내는 일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 뒤의 악마의 얼굴이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근원적인 존재론적 질문에 당면한 인간은 불안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면 일단 정지, 전원을 내린다. 자본주의를 산책하는 김영민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와 함께 한 번 쯤은 산책을 권하고 싶다. 그의 방식은 때때로 무념무상한 일상의 틀에 대해 작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책장을 덮기 전에 고백하는 저자의 한마디는 ‘아, 찔레꽃’이다. 아, 봄날은 간다! 이렇게.

나는, 그렇게, 몇몇 인간들을 그리워하였고, 훈련을 통해 마침내 그리움을 끊었으며, 그 여력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찔레꽃으로 사랑하였다. - P. 255


08051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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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2008-05-1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처를 아는 자에게는 어떤 역사도 미학이 될 수 없다. (상처를 미학으로 처리하려는 모든 태도는, 그 근본에서 파시즘!)역사를 미학으로 꾸미는 짓은 몰락하는 특권층의 비극적 감상주의일 뿐이니, 차라리 그것은 정치학이거나 생물학!

모욕과 상처의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여전한 폭력이다. 왜냐면 상처의 기억은 곧 기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요컨데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의적 분란의 늪을 만들지 말고, 그냥 살과 말을 더 공대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전략이다.

연인들은 '마음'을 챙기느라 '언어'를 늘 혹사한다. 그래서/그러므로 그 언어의 반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결국 벼랑 끝에 떠밀리고 나서야 비로소 꿍쳐 놓았던 '마음'을 호출하지만 알고 보니 호출부호가 없었다!?(얘들아, 도대체 얼마나 얘기해야 하겠니? '마음'을 저리 밀쳐 두고 '피부'와 '언어'로써 연애하라지 않든!? 그 연하고 순한 것이 불쌍하지도 않든!?)

-사랑, 그 환상의 물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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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모르는 철학용어들이나 한자어들이 많이 쓰였네요.
사실 어려운 글은 별로 안좋아하는데
문장 하나 하나의 밀도가 높고 사유가 빛나고 있어서
님의 말처럼 반복해서 음미하게 됩니다.

귀엽기도 해요.^^

sceptic 2008-05-21 20:56   좋아요 0 | URL
그냥 살과 말을 더 공대하는 것이 현명하다...그렇죠? 피부와 언어로 연애해야죠...공허한 마음에 기대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