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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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3년간, 올해 3개월을 포함해서 3년 3개월간 480여 권의 책을 읽었다. 3분의 1쯤이 문학 서적이고 나머지는 인문, 사회, 철학, 역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다. 고전은 물론 최근에 발간된 책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훑어보고 신중하게 선택하고 진지하게 읽어왔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열정은 순전히 ‘무목적성’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걷는 길은 행복하기만 하다. 책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거나 생계와 직결된 일이었다면 나는 절대로 책을 즐길 수가 없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나무 아래, 따스한 햇볕이 드는 호수가의 그늘진 벤치, 창 밖에 눈 내리는 겨울밤의 따스한 거실, 차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버스 창가,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기차의 구석 자리. 책을 읽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겠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습관은 고치고 싶지 않다. 주변에 흔한 다독가에 비하면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목적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1년에 300권이 넘는 책을 본다는 사람도 보았기 때문이다.

  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질은 양을 담보로 하지만 양이 곧 질이 될 수는 없다. 책에 관한한 스스로 프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마음 가짐을 다시 가다듬는 계기가 되는 책이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단순한 활자 해독 수준에서 시작하는 독서는 그 질적 수준이 천차만별일 것이고 한 권의 책에서 건져내거나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적 변화의 과정은 독자들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기억에 남는 대목이 다르고 이해의 수준과 폭도 다르다. 독자의 반응과 이해의 수준이 그 책이 최종 소비자인 독자에게 의미하는 것은 작가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방법에 따라 같은 책이 독자마다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면서 쉽게 간과했던 ‘책을 읽는 방법’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가? 왜 책을 읽는가?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질문에서 출발한다면 이 책은 독자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 갈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를 처음 만난 건 <일식>을 통해서였다. 도쿄대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8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등장한 괴물 같은 소설가로 기억한다. 무라카미 류와 비교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내가 ‘괴물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쓴 이유는 소설 <일식>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중세 유럽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권의 소설을 더 읽었지만 처음과 같지 않았고 <장송>은 아직 읽지 못했다.

  말하자면 ‘읽을 읽는 방법’에 대한 그 주관성과 허다한 방법론 속에서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이름 때문에 읽은 책이다. 이 책은 몇 마디 충고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서 전해지는 실천과 경험의 충고가 뼈에 사무친다. 매끈한 말솜씨와 화려한 수식으로 현혹시키는 종류의 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천적 방법론으로 가득하다. 특별한 노하우나 비법을 전수하는 책은 아니지만 저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실화를 통해 실전에 필요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천천히 읽어라!’로 요약된다. 속독법에 관한 책이나 속독법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겠지만 ‘슬로 리딩’이라 명명된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양의 독서에서 질적인 독서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다 보면 매력적인 ‘오독’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독(遲讀)’이 곧 ‘지독(知讀)’이라는 말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을 요약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푸코의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등을 예로 들어 슬로 리딩을 어떻게 실천하는 지 직접 보여주는 대목은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공감을 주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이 읽는가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 읽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용적 목적에 따라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조사하거나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들, 단기간에 레포트나 논문을 써야 하는 사람들을 예외로 하더라도 책이 하나가 도구가 되거나 단순히 정보 수집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이 책은 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나에게 책이란 무엇인가? 가끔 떠올려 보는 생각이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자기 점검의 시간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서로 곁눈질하고 배워가며 자신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오늘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흐린 하늘을 쳐다보며 휴일의 아쉬움을 달랬던 나는 화창한 봄날이 와도 책을 찔러 넣고 떠날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즐거움으로 가득하리라. 그래서, 행복한 여행은 계속된다.


08033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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