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 -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 이야기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제인 반 님멘 지음, 김현경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예술은 우리를 특별한 매혹의 세계로 안내한다.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설명할 수 없는 미적 감수성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기쁨이다. 한 화가의 그림이나 성향에 몰입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고 다양하고 폭넓은 그림에 대한 애정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예술, 특히 그림은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감동을 전해주기도 하고 그림 하나가 주는 감동을 평생 잊기 어려울 수도 있다.

  르네상스를 빛낸 화가 중의 한 명인 라파엘로의 그림은 부드러운 빛과 여유 있는 인물들의 표정으로 기억된다. 그 중에서 젊은 피렌체 사람의 초상화 ‘빈도 알토비티’라는 젊은이는 대단한 매력을 발산한다.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과 제인 반 님멘이 쓴 <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는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작가의 한 작품을 중심으로 이렇게 역사를 가로지르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은행가였던 주인공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 요즘 말로 얼짱에 수많은 오빠부대를 거느릴 만한 미남이다. 단순하게 잘 생겼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것 너머까지 전하는 능력을 지닌 라파엘로의 그림은 보는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 은행가의 그림은 모나리자와 비교되기도 하고 있으며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매력을 묘사하고 있다. 금발의 젊은 남자가 오른쪽 어깨너머로 정면을 응시한다. 검은 모자를 쓰고 있고 푸른색 망토를 걸치고 있다.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으며 이마와 금발 머리에 부딪히는 빛은 환하게 반사된다. 귀밑머리는 가늘고 섬세하다. 아직 솜털이 벗겨지지도 않은 것 같은 남자는 미소년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눈에 옥의 티처럼 보이는 반지 낀 왼손은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다. 오른쪽 어깨부분 가슴에 얹은 손은 나중에 그려 넣었다는 심중을 굳힐 수밖에 없다. 녹색 화면을 배경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젊은 은행가의 눈은 깊고 푸르다. 빨간 입술과 오똑한 코, 짙은 눈썹과 하얀 등은 현실 밖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이 한 장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1512년경이었고 주문받은 그림은 라파엘로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탄생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초상화는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결혼기념이나 조상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젊은 은행가의 초상화는 수백 년 동안 상속과 매각을 통해 주인이 바뀌다가 지금은 위싱턴의 미국국립미술관에 걸려있다.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그림의 행방과 그림을 둘러싼 수많은 사건들은 마치 영화처럼 인상적이다. 통시적 관점에서 그림의 이동이 보여주는 경로는 그대로 당대 사회의 역사와 문화적 요인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미술사 여행을 이 초상화 하나로 떠날 때 지루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관심 갖고 있던 작가도 아니고 그림이 주는 이미지나 느낌이 환상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초상화일 뿐이다. 과장과 왜곡이 보태지기도 하겠지만 초상화가 주는 감동이 얼마나 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게는 통용되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 한 점이 500여 년의 세월을 견뎌온 과정이 그대로 소설처럼 흥미롭기도 하고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무관심한 태도와 경직된 사고에서 창의력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 내가 생각한 것이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가 틀리다는 오만은 이미 수구와 보수를 넘나드는 위험한 생각이다. 콘크리트처럼 생각이 굳어지면 깨지기 전까지 바뀌지 않는다. 그림에 대한 숱한 해석과 다양한 논의들은 풍성한 잔치와 같다. 긴 세월 속에서도 그 빛과 이미지를 잃지 않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술적 감동은 여전하다. 미술사에 대한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이후에도 여러 사람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된다. 수많은 복제가 이루어지고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 미술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이 그림에 대한 동료나 후대 화가들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한 장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종횡무진 서양 미술사에 얽힌 에피소드들은 논픽션 드라마처럼 흥미 있지만 번역된 문장이 매끄럽지 않기 때문인지 전체적인 흐름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 국수처럼 따로 떨어진 느낌이다. 유기적인 문장들 간의 결합이 아쉽기만 하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용 밖의 문제이다. 본문 237페이지와 이후 부록과 주를 포함해 370페이지이다. 부록과 옮긴이의 말은 물론 마땅히 들어가야 한다. 주도 빼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본문 237페이지에 불과한 책의 가격은 무려 29,000원이다. 어지간해서 책값 이야기는 잘 안하는데 하드커버와 컬러 도판이 필연적이었다고 해도 이 책을 화집이 아닌 일반 도서로 판매할 목적이었다면 지나친 가격이다. 소장 가치가 있는 책도 아니고 그저 르네상스 시대 한 그림에 대한 후일담으로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편집과 디자인 그리고 가격을 제시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다.

어깨너머 아득한 눈빛을 던지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맨 처음 떠올랐던 이 책의 표지가 화면에 가득하다. 그림은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 휴식할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를 제공하며 우리를 이상적 유토피아로 이끌기도 한다. 완전한 저 너머의 세계에 가고 싶지만 이 책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는 않다.


080328-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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