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사 전(傳) - 한국사에 남겨진 조선의 발자취
김경수 지음 / 수막새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풍속사나 생활사와 같은 미시사가 아니라 왕조 중심의 거시적 안목에서 바라보는 역사는 왠지 허망한 신화나 전설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통탄할 만한 우리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린다. 21세기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삶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변화의 속도에 어지럼증을 느낄 만큼 세상은 달라지고 있지만  때때로 우리는 부적응의 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먼 미래에 역사가들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조선 왕조 500년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위정자들의 이야기는 인간 본성의 가장 극악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김경수의 <조선 왕조사 傳>은 철저하게 왕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傳’이라는 형식이 황제나 영웅의 일대기를 걸출한 문장가가 쓴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전傳’이 갖추어야할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망해버릴 때까지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에 이르기까지 스물일곱 명의 조선 왕조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에 해당하는 책이다. 단 한 명의 왕도 빼놓지 않고 연대기 순으로 재임 기간을 충실하게 적시하고 있다. 종실의 관계와 권력의 암투 과정, 당쟁과 세도 정치 사이에서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의 왕들은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동정의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왕의 지위는 인간과 하늘의 매개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왕조시대는 끔찍했을 것이다.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한 나라를 책임져야 했고, 가신들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독살 되기도 했던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과는 무관한 저 높은 곳의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스물일곱 명의 왕 중에서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격을 겸비한 왕을 우리는 얼마나 손꼽을 수 있을까?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최고의 르네상스였다고 평가받는 세종과 정조 정도를 제외하면 객관적인 평가 자체가 무의미하다. 물론 개인적인 능력만을 놓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무시한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피맺힌 한을 가슴에 담고 위정자들에게 억눌려 살았던, 자신의 운명을 온통 그들에게 내맡겨야 했던 백성들의 한숨과 눈물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이 책은 단편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사람들에게 구슬을 꿰는 실과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상황들을 모두 설명해 줄 수 없는 한계가 있는 대신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왕조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와 해석, 평가 보다는 객관적인 사실들의 전후 관계와 인과 관계를 연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통시적인 관점에서 조선왕조 전체를 일괄할 수 있는 책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미시사가 각광을 받았다.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다. 구체적인 역사, 생활 속의 역사, 민중들의 역사, 여성의 역사가 우리의 삶이고 과거라는 것은 자명하다. 위정자 중심, 승리자 중심, 왕권 중심의 역사라는 본류를 무시할 수 없지만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외시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생활사박물관>이 그래서 주목을 받았고 최근 이덕일의 저작들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명호의 <조선 왕비 신록>은 이 책과 좋은 짝이 될 만하다. 남성이 있다면 인류의 절반은 여성이다. 왕이 있으면 왕비가 있다. 당연한 이치지만 왕을 둘러싼 권력의 승계와 암투에는 왕비의 역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한 것이 아닐까? ‘조선 왕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왕비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두 책은 비교해가면서 읽을 수 있는 흥미 있는 관계에 놓여있다. 서로 다른 저자의 책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 서로 보완하며 읽을 만하다.

  왕들의 삶은 결코 행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왕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인 세자 책봉에서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교육과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는 한 인간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위에 오르더라도 자신의 뜻과 이상만으로 조선을 통치할 수도 없었고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백성들의 삶과 국가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만큼 일사분란하게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국내외 정세와 정치적인 상황들이 한 개인의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나 절대 고독과 개인적인 고뇌를 느끼며 운명을 달리했던 수많은 조선의 왕들을 하나씩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사실들의 나열과 대표적인 사건들 중심의 전개라는 특징 없는 책이라는 아쉬움도 남는 책이다. 그래도 조선왕조와 세계사를 비교한 연표나 당쟁의 출발과 전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부분들은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국사에 남겨진 조선 왕조의 뚜렷한 족적들은 결국 근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먼 과거의 미래였다. 미래의 과거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은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의 역사는 대통령과 정부의 역사가 아니라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사람들 모두의 역사이다. 21세기의 역사를 우리는 지금 여기에 발로 써 나가고 있는 것이다.


080316-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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