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
이택광 지음 / 갈무리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책 좀 읽었다는 장석주가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읽다가 울고 싶었다는 고백을 읽은 적이 있다. 이해하지 못하거나 육화되지 않는 책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철학적 기초가 부족하거나 번역상의 어려움, 관념적인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 등 이유는 다양하다. 앎과 지식으로 내면화 되지 못하는 철학과 사상은 무의미하다. 현대 철학이든 고대 철학이든 사유의 방식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인 언어에 대한 문제만 남겨 놓는다면 쉽게 해결될까? 비트겐슈타인처럼 명징한 논리학으로 언어를 분석하기만 하면 철학적 명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들뢰즈나 가타리, 라캉과 푸코에게 빚지고 있는 현대 철학의 이론들은 명민한 철학자만의 몫은 아니다. 이택광은 <들뢰즈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라는 책을 통해 들뢰즈를 무기로 들고 나왔다. 대상은 전방위적 ‘문화현상’들이다. 문학에서 영화에 이르는 다양한 예술 장르와 사회 현상들을 아우르는 잣대로 삼는 것은 현대 철학의 분석틀이다.

  문화비평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가 정착된 것은 80년대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붕괴로부터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좌우의 대립이나 민주와 독재의 대결 구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가 붕괴되면서 사회 현상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정신적 아노미 현상처럼 이념을 대신하는 자리에 문화가 등장한다. 이론적 토대위에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는 현실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는 책과 펜이다. 읽고 쓰며 실천과 행동으로 다양성을 표방하는 세대에게 탈주와 회귀를 읽어내려는 노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 이택광은 영문학을 전공한 후 영국으로 날아가 발테 벤야민을 연구했고 문화이론을 공부했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로 그를 만났다. 그림 이야기나 하며 소일을 할 만큼 안온한 현실에 발딛고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2002의 그를 만나는 일은 신선하다. 개인적인 관심과는 무관하지만 시대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는 후일담이 아니라 현재를 알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저자의 지적 이력을 추적해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탈주와 회귀, 차이와 반복, 시뮬라크르 혹은 욕망과 분열, 증식, 글쓰기 등의 생소한 용어들에 대한 개념들을 그가 이해한 방식들로 풀어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하게 철학적 개념과 용어에 대한 해설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과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하기 위한 좋은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를 보지 않았거나 카프카의 <성>, <심판>을 읽지 않았거나 밀란 쿤데라의 <느림>을 모른다면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어진다. 어떤 책이든 한계가 있겠으나 이 책은 실제 상영된 영화, 출판된 영화들을 바탕으로 이론의 잣대를 들이밀기 때문이다. 들뢰즈나 가타리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듯이 이택광의 방식은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편협한 문학이론이나 철학의 개념들을 억지로 끼워 맞춘다고 예술 혹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달라지진 않는다. 거대담론은 언제나 구체적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반 독자나 관객의 입장에서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어쩌면 무의미한 노동에 가깝다. 즐거운가? 재밌냐? 로 요약되는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들만의 리그로 끝날 우려가 있다.

  가장 최근의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라는 다소 동떨어진 책을 통해 그를 만났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글이 안내하는 혹은 그가 걸어온 관점의 변화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흥미있는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개별 철학자들의 개념이나 이론들을 내면화하고 그것들을 실제 문화현상에 적용하고 분석하려는 개인적인 흥미와 관심들을 이해할 필요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면 혹독한 비판일까? 육화되지 못한, 한국적 풍토와 개념으로 전환되지 않는 사상은 낯선 이방인의 몸짓일 뿐이다.

  어쨌든 저자의 관심과 노력은 흥미롭다. 그가 이해한 개념들 사이를 따라 걷다 보면 현실밖의 현실들이 더 실감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이 영화이든 소설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혹은 사유하고 있는 세상의 어떤 일면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것은 저자의 도움 없이도 걸을 수 있지만 그와 함께 걷는 길이 그리 낯설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이어지는 이택광의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일은 내게 언제나 커다란 즐거움이다.


08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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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소개)『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from 도서출판 그린비 2008-08-11 14:32 
    ‘생명의 철학’으로 다시 읽는 들뢰즈『시네마』—탈인간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예술의 역능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클레어 콜브룩 지음 정유경 옮김|도서출판 그린비|갈래 : 철학, 인문발행일 : 2008년 8월 5일 | ISBN : 9788976823151신국판변형(150*220mm)|304쪽리좀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서 들뢰즈의 독특한 이미지론을 통해 철학과 영화 그리고 예술의 역능을 살핀다. 살아 있는 인간 신체가 이미지화하는 능력으로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