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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등 이펙트 -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세상 살아가면서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가장 아끼고 기대고 의지하며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냉정하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르다. 객관적으로 감정의 우열를 가릴 수 없고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과 배려하는 태도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관적 감정과 관점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행동한다. 상대방의 태도와 반응에 따라 내 마음은 춤을 추고 스스로의 자아 정체감이 흔들린다. 그 많은 사람, 관계의 네트워크는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복잡하다.
이렇게 많은 관계망 속에서 특정인에 대한 영향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관심과 배려와 보호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구속하고 집착하며 억압하는 관계는 누구나 맺고 있다.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러한 영향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로빈 스턴은 자신의 상담 경험과 피상담자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영향 관계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가스등 이펙트>는 그렇게 탄생한 책이다.
인간의 심리 상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와 같다. 마음이 원인이라면 행동은 결과가 된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생각과 행동이 불일치할 때 생기는 괴로움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지배하는 원인을 알지 못할 때 생기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더불어 원인을 명확히 알지만 제공자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역할 모델일 경우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처방전이다.
애인이나 남편, 직장 상사나 친구, 가족이 대표적인 가해자gaslighter이다. 피해자gaslightee는 대부분의 경우 여성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은 여성 피해자로 한정된다. 상대방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하는 당연한 소망과 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가스등 이펙트’가 발생한다. 1944년에 제작된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열연한 주인공 폴라는 남편 그레고리와 결혼한다. 탐욕스럽고 권위적인 그레고리는 이모가 남긴 보석을 찾기 위해 다락방을 뒤지는데 가스등의 특성상 다락방에 불이 켜지면 폴라의 방에 있는 가스등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는다.
이처럼 ‘가스등 이펙트’는 두 사람 사이의 영향 관계를 의미한다. 한 사람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상대방은 그에게 인정과 사랑을 원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문제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아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영화에서는 그레고리가 처음부터 재산을 가로챌 분명히 나쁜 의도가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처음부터 사악한 의도를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만 생각한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가에 어긋나는 작은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논리를 세우고 상대방도 자신과 동일한 논리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끔찍한 일이지만 현실에서, 주변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늘 함께 생활한다. 그것이 문제인 줄도 모르고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막강한 영향력 아래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은 ‘가스등 이펙트’의 피해자들인 것이다.
첫째 ‘불신’의 단계에서 ‘자기방어’를 거쳐 ‘억압’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하고도 실감나는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효과는 저자가 명명했지만 일상생활을 통해 항상 접하고 있다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와 영향을 받는 피해자의 관계는 한 인간의 주체성과 연관된 문제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과 이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폭력적 성향을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선량한 피해자를 만나게 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나쁜 의도가 없을 경우 가해자의 태도나 입장은 변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참고해야할 이야기가 많고 실제 상황들이지만 객관적이지 못한 점들이 눈에 띄는 것은 아쉽다. 먼저 인용된 사례의 문제이다. 애인과 남편, 직장상사와 어머니에게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책의 시작에서 끝까지 반복해서 인용되고 재해석되며 문제의 극복 방법에 동참하고 있다. 하나의 사례가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고 일반화하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 변수가 많다. 다양한 사례로 공통점을 끌어내거나 설득력 있는 일반화가 아쉬운 장면이다.
두 번째는 여성 편향성의 문제이다. 사례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 여성 피해자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를 예로 든 미첼만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일 경우가 많겠지만 남성 피해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폭넓은 사례 수집과 연령, 성별, 인종과 직업을 망라한 조사가 이루어졌다면 보다 설득력있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관성의 문제이다. 상담 사례 중심이기 때문에 저자가 경험한 폭을 벗어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경험해 보지 않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다양한 사례들에 대한 조사 혹은 단계별로 심각서의 정도를 객관화하는 작업은 쉽지 않겠지만 읽으면서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과 조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아쉬움이 많은 책으로 분류한다.
어쨌든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변화는 시작될 것이며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관계의 중심은 ‘나’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주장과 타인에 대한 적절한 배려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기 존중감에서 비롯된다. 우주의 중심은 나지만 지나치면 타인에게 ‘가스등 이펙트’를 나타내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조심하라!
080213-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