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인쇄소 ㅣ 창비시선 541
함민복 지음 / 창비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화도로 가 산다는 시인의 이야기를 텍스트로만 읽은 적이 있다. 소설가와 달리 노력으로 이를 수 없는 감각들. 사물과 세상의 이면,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증오, 빛과 그림자의 틈을 볼 수 있는 안목. 아니 그보다 언어로 토해내는 정성이 필요한 시인은 태어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평범한 일상과 자본주의 욕망과 자리를 탐하는 숨기지 않는 작가가 어디 한 둘인가. 그렇다고 천상병이나 함민복 같은 시인만 진짜 시를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지젤 사피로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에서 작가의 도덕성이라는 격렬한 논쟁을 다루고 있지만 폴란스키나 하이데거 혹은 서정주와 고은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관점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쓰는 대로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 아주 오래 고민했으나 보이는 느끼는 대로 시가 되는 시인과는 다른 태도일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없어도 적절한 거리에서 내게 가르침을 준 작가들과 시인 몇 분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 영화와 드라마 밖 배우의 사생활, 텍스트 넘어 인간적인 작가의 일면에 무관심한 건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는 딜레마 앞에서 우리는 매번 조금씩 다른 태도를 보인다. 사람일까, 상황일까?

아무튼 함민복 시인은 시인이다. 그렇게 시인으로 살고 있어 다행이다. 시를 쓰는 쓰든 쓰지 않든 그의 시선이 닿는 자리에 꽃이 피고 연민과 온기가 남는다면 충분한 일이다. 달콤한 말로 사물과 감정을 포장하지 않고, 그럴듯한 글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세월이 하 수상한데 따뜻한 말과 좋은 글은 모두 시집 속에 숨어 사는 듯하다.

물빛인쇄소

잔잔 잔잔 제 몸을 구부려

반짝 반짝 빛을 출력하는 바다

긴긴 가르침

곁에 있어도

마음에 마음을 문대보는 일

마음에 마음이 새겨지길 바라는 일

떨리고

아직 가슴이 타

눈물렌즈

사랑은 물빛인쇄소

마음에 마음을 문대는 일이 어디 쉬운가. 환대와 수용의 자세가 없는 이에게 마음을 문대는 일은 폭력에 가깝다. 감정의 과잉 토로만큼 불편한 상황이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물빛인쇄소’라는 말은 물밑에서 손을 잡고 있을지 몰라도 너무 먼 섬과 뭍의 관계를 말하는 듯하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정현종의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해석을 낳았는가. 좋은 시는 저마다 다른 빛을 출력하는 인쇄소다.

섬과 뭍

아무리 커도

뭍보다 작음을 인정하는

섬은 늘 겸손하지요

그러나 작음이 뭍보다 큰 섬은

들판과 바다가 있어 푸름도 도시보다 크지요

푸름의 섬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푸름의 뭍

섬을 찾지요

섬 속에 뭍이 있고

뭍 속에 섬이 있어

우리 섬 같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뭍이 되고 섬도 되어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가지요

자연과 사람, 사물과 사람 사이에 서성거린 시간이 시가 된다. 아무도 섬이 되고 싶지 않지만 누구나 뭍에 어울려 사는 건 아니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소용돌이 파문에 그치고 만다. 들판도 바다도 모두 푸른 빛이라고 퉁치면 그만일 수는 없다. 서로에게 뭍이 되고 섬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면 당신과 나는 꽃이 될 수 있을까.

꽃과 나

꽃은 시간 위에서 피어나고

꽃은 시간 위에서 지네

시간은 꽃이 되어 피어나고

시간은 꽃이 되어 지네

나는 당신 안에서 살고

나는 당신 안에서 피어나네

당신은 내가 되어 살고

당신은 내가 되어 피어나네

꽃이 될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일에 익숙한 삶은 어떤가. 위대한 시간 앞에 겸손하라는 금언이 아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체념일 리는 더더욱 없다. 시인이 말한 당신은 당신이 아닐 수 있다. 어떤 시간을 보내야 사람은 꽃이 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꽃이라는 위로는 현실에서 통하지 않는 위선에 가깝다. 시간은 꽃이 될 수 있지만 꽃이 사람이 되진 못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만 꽃인 시간이 필요하다.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이면 충분한 찰나. 영원을 약속하지 않아도 좋은 꽃으로 피어나는 시간이면 그만이다. 죽음을 예비한 시간 앞에서 더더욱 시간은 꽃일 수밖에.

공구함

죽음은 멍키스패너, 삶을 조여주고 풀어준다

죽음은 윤활유, 삶을 부드럽게 돌려준다

죽음은 망치, 삶을 튼튼하게 고정시켜준다

죽음은 와이어브러시, 삶의 찌꺼기를 제거해준다

죽음은 순간접착제, 삶의 균열을 메꿔준다

죽음은 먹줄, 삶의 방향을 튕겨준다

죽음은 수평기, 삶의 균형을 잡아준다

죽음은 대패, 삶의 군더더기를 깎아낸다

죽음은 줄자, 제 몸 풀어 삶을 재준다

아, 죽음은 공구함, 삶을 담고 있다

죽음이 이리 왕성하게 살아 있어

죽음은 없다

삶은 없는 죽음을 담고

무겁게 들고 있는

공구함

누구나 죽음을 껴안고 산다. 물론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만 자기 삶을 성찰한다. 자기 죽음은 돌아볼 수 없고 공구함 따위에 비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찰나의 순간들, 지나 버린 아쉬움,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들이 아닐까. 깊은 가을 하늘에 흐르는 새털 같은 구름처럼 다시 그 모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공구함에 담아보는 사람들을 위한 함민복의 시가 아프다. 창백한 푸른 별에 사는 생명들은 거의 다르고 조금 같거나 조금 다르고 거의 같다. 멀리서 보면 모두 희극이다. 현미경으로 삶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시인의 충고다.

매일 바라도 지는 해를 볼 수 있는 곳에 사는지 알 수 없으나 일출보다 일몰을, 탄생보다 죽음을, 창조보다 소멸을, 같음보다 다름을 들여다보는 일이 시인이라는 직업이 아닐까 싶다. 함민복이 오늘도 물빛인쇄소에서 찍어낸 이미지와 다정함보다 ‘화살표’ 연작이 더 닿을 만큼의 거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 또한 한 사람의 독자로 충분한 위로를 받는다. 시인과 나와 당신과 꽃과 죽음과 아주 조금 남은 시간이 모두 조금 같으면서 거의 다르다.

​

물빛인쇄소 2

거의 다르고

조금 같은

조금 다르고

거의 같은

생명은

생명들은

물빛

물빛인쇄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