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 인간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차명식의 역사 강의 1
차명식 지음 / 북튜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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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심장이 없는 것이고, 나이 마흔에 여전히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이성이 마비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너무 자주 인용돼 생각지도 않고 흘려보내는 말 중 하나다. 그렇다면, 스무 살에도 사회주의자인 사람이 거의 없는 오늘의 현실은 행복한가, 불행한가. 통계조사를 인용할 것도 없이 좀 산다는 나라 17개국 중 유일하게 행복의 첫째 조건을 물질적 풍요로움, 즉 돈이라고 응답한 나라 대한민국의 현실은 괜찮은가.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은 현실 부적응자이며 비정상적인 소수자에 머물러야 할까. 그래도 스스로 예수를 자처하는 세계 최강국의 정신병자나 홀로코스트를 생명 연장, 아니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자보다는 낫지 않은가.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데 그걸 해내겠다는 사람이 가끔 리더의 자리에 오른다. 개인적 지지와 무관하게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렇게 아주 조금씩 진보를 거듭해 온 인류의 역사가 놀랍기만 하다. 반개혁, 반혁명 세력의 지지 기반이 궁금한 적은 없다. 유사이래 정과 반이 합을 이뤄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도로 제자리이거나 한발 물러선 것 같은 착각이 들지 않을 때가 있었나 싶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뒤를 돌아보면 과거로 회귀하거나 역진 현상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나선형의 진화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밀란 쿤데라의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시대다. 1445년 구텐베르크가 성경 활판 인쇄를 시작했고 뒤이어 1492년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떠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꼭 100년 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벌어졌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876년 벨이 전화를 발명해 특허를 냈다. 1894년 동학혁명이 벌어졌으며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됐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인터넷이 등장하기 23년 전, 그러니까 4.19 혁명 8년 후에 유럽에서 시작된 68혁명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나 2001년 미국 무역센터 9.11 테러보다 그 여진이 더 길고 진동이 크다.

차명식은 “인간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68혁명’을 도구로 삼아 근대, 아니 현대 사회의 근간을 이룬 사상적 토대와 인류의 행동 방식을 들여다본다. 흔히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믿는다. 자유 의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자율적인 삶을 영위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혁명과 반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율 신경계와 진화한 존재로서 생물학적 반응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며 보이는 것조차 외면하는 습성을 가진 인간의 삶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은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서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라고 굳게 믿고 싶은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지금 우리에게 68혁명은 왜 필요한가.

그래도, 여전히 근본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의 시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저 연어들처럼 과거로 회귀하는 사람들, 취향과 안목에 대해 살피려고 장 보드리야르와 부르디외를 소환하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삶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하지 못하고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들, 그 수많은 작은 희생과 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더듬는 일이 바로 일상 속의 ‘혁명’이며 68년에 벌어진 사소함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왜 네타냐후의 얼굴과 오버랩되며 구토를 유발할까. 체 게바라와 실존주의 , 마틴 루터 킹과 맬컴 X, 한나 아렌트와 위르겐 하버마스를 살핀 후에는 이제 꼰대가 되어버린 세대의 성찰과 회한이 아니라 ‘핏덩이’들의 혁명이 필요할 때가 아니냐는 역설로 들린다. 여덟 번의 강의를 모은 책이다. 2권으로 나뉘어 ‘세계를 바꾸기 위한 세 가지 방법’으로 이어진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로 대표되는 비트 세대, 히피와 여피, 페미니즘 등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는 혁명의 후유증, 아니 오늘의 바탕을 이루는 이야기들은 억지스런 인과관계로 읽히지 않는다. 나와 현재를 돌아보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정확한 방법은 뒤를 돌아보는 일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영화 《프라하의 봄》으로만 기억하는 68혁명은 어쩐지 좀 서글픈 느낌도 없지 않다.

내가 보낸 시간의 총합이, 시간의 누적이, 말과 행동의 결과가 나다. 그 누구도 아닌 각자의 어제와 오늘이 그렇다. 변화를 시도하거나 새로움이 없다면 관성의 법칙은 예외 없이 적용될 것이다. 불온한 단어로서의 ‘혁명’이 아니라도 좋다. 중국 은나라 탕왕이 세숫대야에 새겨둔 ‘일신우일신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야말로 혁명의 할애비가 아닌가. 다른 길로 가보자, 어제 간 길 말고.

68혁명은 ‘이기의 시대에 일어난 되기의 혁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너는 ~이어야 한다”는 명령에 맞서, 그 명령에 반해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한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것이지요. ‘이기’는 존재를 정의함으로써 국면을 확고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가능성을 제약합니다. ‘되기’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도약이고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열게 하는 거고요. -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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