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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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았다. 법과 도덕은 부자에게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세상 최후의 논리>를 돈에서 보았다.

근대 이후 세상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왕과 귀족, 성직자가 다스리던 나라가 민중demos이 스스로 지배cratos하는 민주주의democracy 국가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신흥 부르주아가 등장하며 누구나 ‘자본’을 축적할 수 있다는 꿈이 생겼죠. 전통적 계급 사회가 무너진 계기는 프랑스혁명 등 정치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먹고사니즘’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고,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진 돈은 권력과 명예까지도 복종시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라는 경제 제도는 현재까지 인류사회의 표준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호흡하고 있으나 우리는 여전히 다양한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19세기 유럽은 용광로처럼 들끓었죠. 뜨거운 가슴으로 일으킨 혁명과 차가운 머리로 계산한 자본주의의 이익이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를 누군가는 빅토리아 시대로, 또 누군가는 벨 에포크라 명명했으나 변화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경제적 불평등과 막강한 자본의 힘이었습니다. 합리적 이성은 모든 인간이 존엄하며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으며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자본주의는 개인의 노력과 기회가 보장된 세상을 꿈꾸게 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 운명이 결정되던 시대를 지나 누구나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현대인의 희망 고문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발자크는 시대의 욕망에 충실했으며 이를 가장 정확하게 담아낸 작가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가 알다시피, 19세기는 대부분 발자크의 발명품’이라며 감탄했습니다. 발자크는 역사, 경제, 통계 관련 자료를 따로 찾아볼 필요가 없을 만큼 자본주의적 인간의 욕망과 일상을 정확히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법학을 전공했으나 소설에 매료됐고 사업 실패로 빚을 갚기 위해 소설을 쓴 생계형 작가 발자크는 사치와 허영이 가득했으며 귀족을 숭배하고 왕당파로 자처했던 모순적 인물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함이 발자크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고리오 영감과 두 딸의 눈물겨운 계급 상승 의지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천피, 부동산 불장 시대에 벼락 거지가 됐다는 말을 유행시켰고 FOMO 현상으로 한반도는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파이어족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유한계급은 현대판 귀족으로 거듭나고 싶은 대상입니다. 과시적 소비와 베블런 효과 뒤에 숨어 있는 비판 정신은 우리 사회에 유효한가요? 성찰과 변혁 의지는 희미해졌고, 각자도생과 세습 중산층 시대는 공고해 보입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루저일까요? 1899년 세기말, 소스타인 베블런의 고민은 경제 이론이 아니라 사회 변동에 닿아 있는듯 보입니다. 가끔,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이나 주장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형적인 허수아비 오류입니다. 발자크가 고리오 영감을 내세운 이유가 자본주의 비판이 아닌 것처럼 베블런은 유한 계급을 비난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을 리 없습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부정한 적도 없고 급진적으로 계급 사회 타파를 외친 적도 없습니다.

다만 고리와 영감과 ‘보케 하숙집’에 모여 사는 사람들, 특히 파리로 유학 온 외젠 드 라스티냐크가 마지막에 “자, 이제 파리와 나, 우리 둘의 대결이다!”라는 말은 오래 두고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외젠은 자본주의 타파를 결심했을까요, 아니면 도시의 욕망과 유한계급에 포섭된 걸까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 독자의 선택 문제일 겁니다. 소설의 결말이 아니라 자기 삶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 다면 언제나 책 혹은 독서 모임은 지적 허영에 매몰되기 쉽습니다. 유한 계급의 고급문화 취향을 추종하는 건 존경과 명예 때문이 아니라 예술적 감수성이라는 본능 때문이 아닐까요. 자본주의 태동 이전부터 인간의 욕망은 작아진 적이 없고 유한계급의 사다리 걷어차기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물론, 푸른 하늘이 계속되는 한 사람들은 또 현실에 적응하며 각자 선택한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걷다 지치면 잠시 앉아 또 이야기 나누지요. 책, 고전은 교양이 아니라 언제나 진행형인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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