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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평점 :
오래된 책은 삭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물질적으로 동일한 것은 없다. 매 순간 변화하여 예전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고 죽고 변화하여 이전의 그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영혼의 경우는 말한 필요도 없다.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헛소리다. 모든 인간의 모든 생각은 매 순간 급격한 변곡점을 갖는다. 대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는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 책에 미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은 세상을 바꿔 놓았다. 네트웍 세상에선 ‘No network, no work’이라는 말에 공감이 갈 때도 있다. 모든 정보는 열려 있는 듯하지만 열린사회가 아니라 닫힌 사회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실감한다. 정보화 시대에 정보의 고립 속을 헤매기 쉽다. 책은 또 다른 정보와 지식을 전해주는 단절된 네트웍이 되어 간다. 100년, 아니 50년 전의 세상만 상상해 보아도 책이 지니는 의미와 역할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그만큼 세상은 급격하게 혁명적 변화를 맞이하며 속도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해간다.
이런 시대에 책 이야기가 유효하다면 과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예전에 책은 지식과 정보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한문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대다수 백성들은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는 일조차 불가능했고 접근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한, 혹은 맹목적 열정주의는 슬프기도 하고 때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는 조선시대 책에 관해서 껌 좀 씹고 침 좀 뱉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금속활자로 혁명의 완성을 꿈꾸었던 정도전에서 신채호의 영어 발음에 관한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시대 순으로 인물들을 나열했다. 밥상 좌우에 책 두 권을 펼쳐 두고 읽었다는 세종이나 광적인 수준으로 책 수집에 열을 올린 유희춘이나 책을 탄압하면서 학문을 좋아했던 이중적인 정조,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의 이야기 등 조선 시대를 대표할 만한 ‘책벌레’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강명관의 말투다. 시니컬하면서도 삐딱하다. 예를 들어 ‘백성과 독서물’ 즉 ‘책을 읽는 행위’와 ‘책을 읽는 백성’을 연결시킬 만한 상상력이 부족했던 지배층의 이야기는 새로운 시각으로 시대를 바라보게 한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여도 제 뜻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한글을 만들었다는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이유는 진심이었을까? 다른 지배층도 그렇게 백성들을 극진히 염려했을까? 한문은 지배층이 백성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치려는 이중적 태도는 아니었을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시대를 넘어서 책에 미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 계기와 방법은 다르지만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정도의 차이를 쉽게 측정할 수 없지만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중독성을 지닌 것이 책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수많은 고민들은 이미 철지난 유행가처럼 책 속에서 불리우고 새로운 고민과 통찰들을 번득이는 무림의 고수들의 칼날에 베여도 아픈 줄을 모른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갈증과 안타까움은 깊어만 간다. 끝이 없는 호기심과 지적 욕구는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는 이런 미친 책벌레들이 만들어왔다고 저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역사를 누가 만드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책벌레들이 만든다고 답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언어화되어 있고, 그 언어를 담아 유포하는 것이 바로 책이기 때문이다. - P. 23
혁명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무력에 의해 혁명은 일단 성공하지만, 그 성공이 곧 혁명의 완성은 아니다. 혁명이 내세운 이데올로기가 사회 구성원의 대뇌에 온전히 장착되고,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다수 출현했을 때 비로소 혁명은 완성된다. - P. 24
책 속에 숨은 비밀과 책을 둘러싼 음모와 책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들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극적이고 때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한다. 나만 그런가? 세상에 책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며 낄낄대며 살아가고 싶다. 인생은 살아갈수록 덧없고 욕망은 사그라들며 허허로운 가슴은 끝간 데를 모른다. 책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조용히 손을 내밀고 어깨를 토닥여 줄 때가 있다.
책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겠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은 오만에 가깝다. 책이 그리 좋은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조용한 미소로 답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다잡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반성의 계기도 제공할지 모른다. 아니면 책과 관련된 정신 나간 사람들의 기이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맹목적인 연암에 대한 숭배를 넘어선 평가나 허균의 이야기 등 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과거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명쾌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자의 솜씨도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즐거움이다.
071104-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