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누가 만드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책벌레들이 만든다고 답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언어화되어 있고, 그 언어를 담아 유포하는 것이 바로 책이기 때문이다. - P. 23
혁명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무력에 의해 혁명은 일단 성공하지만, 그 성공이 곧 혁명의 완성은 아니다. 혁명이 내세운 이데올로기가 사회 구성원의 대뇌에 온전히 장착되고,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다수 출현했을 때 비로소 혁명은 완성된다. - P. 24
신권이 승리한 기원은 언제인가? 태종이 정도전의 생각을 빌려 주자소를 만들어 책을 찍기 시작한 그 순간이 바로 기원의 시간이었다. 태종이 금속활자로 찍어낸 바로 그 책이 유교적 정치이념이란 국가는 왕의 의지가 아닌 사대부의 의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 51
오로지 책에 몰입한 독서가 세종은 “즉위하고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좌우에 펼쳐놓았고, 한밤중까지 책에 빠져 도무지 싫은 기색이 없었다”(<세종실록> 5년 12월 23일)고 한다. - P. 56
독서기계 세종은 쉬지 않고 작동했다. 윤회의 걱정처럼 눈에 병이 났고, 그 눈병은 당뇨병과 부종, 임질 등과 함께 말년의 세종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급기야 즉위 24년이 되던 해에는 눈병의 고통이 너무나 심해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지배층의 머릿속에 ‘백성과 독서물’이란 관계, 즉 ‘책을 읽는 행위’와 ‘책을 읽는 백성’을 연결하는 상상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종조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궁극적으로 독서 대중을 만들어낸 것과 달리 오로지 사대부의 탄생에만 기여했을 뿐이다. - P. 70
인간에게 책 읽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무다. 책 읽기가 무너짐에 따라 한국 사회의 교양층이 무너지고 있다. 정녕 어떻게 할 것인가. 율곡의 독서론을 읽고 복잡한 심회를 감출 수 없다. - P. 111
다만 지나칠 정도로 책을 좋아하여 음악이나 여색에 빠진 것과 같았다. - P. 130(<선조수정실록>)
허균이 양명학이나 양명좌파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느니, 근대적 사유를 갖고 있었다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믿을 바 없는 억측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허황한 소리는 그만 좀 하시라. - P. 162
그렇다면 주석가의 주장이 진리가 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인가. 주석가의 주장이 권력과 결합해 비판의 목소리를 뭉갤 수 있으면 진리가 된다. 진리를 만드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이 아니라, 오로지 권력일 뿐이다. - P. 165
언필칭 진리를 외치는 학자 집단이 때로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되어 학계의 권력을 잡으면,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배제하기 일쑤니, 이게 우스운 일이다. 과연 우리는 당쟁에 모든 것을 걸었던 중세를 벗어났는가. - P. 177
여기서 오로지 지적 행위로서의 독서가 생겨난다.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순수한 책 읽기! 이덕무는 오로지 책 읽기 자체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하지만 목적 없는 책 읽기라 해서 과연 목적이 없을 것인가. - P. 232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히 지낼 뿐, 만약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깝다(맹자).”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비록 걱정거리가 없다 한들, 금수가 될 것이다(양웅).” 이덕무는 맹자의 ‘가르침’과 양웅의 ‘배움’이 바로 독서라고 말한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부귀할지라도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이덕무에게 독서는 곧 인간이 되는 길이다. 나는 독서하는 이덕무에게서 지금 세상에서 거의 멸종된 인간 부류의 ‘교양인’의 모습을 본다. - P. 233
하지만 물어보자. 연암의 이 주장은 어디서 온 사유인가. 연암의 사유를 꼼꼼히 검토하면 양명좌파와 공안파의 사유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언어를 빌려오는 것을 표절이라 한다면, 사유의 틀을 통째 빌려오는 것은 뭐라 말해야 할 것인가. 연암은 독창을 말했지만, 그 독창을 설파하는 사유 자체는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하늘 아래 어디에 새로운 것이 있다던가. - P. 261
생각해보라. 문체반정의 된서리를 맞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결코 당대에 인쇄되어 유통되지 않았다. 또 하나, 새로운 사유에 철퇴를 내리고, 주자학 서적의 보급에 골몰한 정조가 여전히 개혁군주로 보이는가? 조선시대 왕에 대해 호감을 갖고 계신 분들은 부디 생각을 바꾸시라. 중세의 전제군주는 왕권이 위협을 받으면 백성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 왕에 대한 찬양은 그만두시기를 바란다. - P.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