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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Aubade」
창밖에 가을이 당도했다. 계절의 한쪽인 여름이 사라졌다. 가을도 명백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대로, 인간은 상상의 질서를 받아들여 정교한 제도와 규범을 만들었고, 이야기에 ‘환장’하는 본능이 문명발달의 초석을 만들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혹은 쏟아지는 빗줄기와 잿빛 하늘이 만든 풍경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지배한다. 어디 그뿐인가. 별이 바람에 스치우기도 하고, 길섶에 핀 꽃 한 송이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무엇을 먹고 어디를 바라보며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제각각 완강한 희망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이 마음에 들어 클레어 키건의 책을 한 권 더 읽었다. 『너무 늦은 시간』은 3개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창작 연도와 무관하게,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클레어 키건은 ‘여성’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올리고 때로는 표면 아래에 둔다.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은 결혼을 앞둔 카헐과 사빈의 이야기다. 여성 혐오는 ‘차별’의 카테고리 안에 있다. 관점과 시선이 바뀌지 않으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대상과 개념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 그것이 자기 신념 혹은 진심인 사람은 당해내지 못한다. 대개 정치와 종교가 그런 분야다. 하지만 사회에서 벌어진 질서와 규범 문제는 이들이 지켜야 하는 마지노 선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영국도 옛날부터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건 아닐까. 신생국 미국도 다르지 않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하인리히 뵐 하우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성 작가의 이야기다. 한국 단편 중에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경험을 다룬 작품이 여럿이다. 창작의 고통, 그곳의 에피소드, 작가의 사유와 창작 과정 등을 살필 수 있어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클레어 키건은 특별히 교훈을 담거나 진지한 성찰로 독자들에게 반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심한 장면과 객관적 시선으로 여운을 남긴다. 판단은 읽는 사람의 몫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남극」의 첫 문장이다. 일탈을 꿈꾸던 가정주부의 호기심이 비극을 만든다는 교훈은 물론 아니다. 사랑과 욕망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그것은 남녀의 권력관계로 해석하거나, 기울기가 다른 감정의 불균형으로 다루는 클리셰도 아니다. 물리적 힘의 차이, 사랑하는 방식과 태도의 개별성 문제에 기인한다. 그것을 남성 혹은 여성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까. 그렇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논쟁과 토론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쉽게 결론에 도달하긴 힘들어 보인다.
안온한 일상, 별일 없는 하루, 평화로운 인생을 꿈꾼다면 소설은 언제나 강 건너 불구경, 내가 겪지 않아서 좋은 슬픔, 나른한 재즈를 배경으로 차 한 잔의 여유에 필요한 가십거리 정도가 아닐까. 혹자는 네가 무얼 먹었는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네가 무엇을 읽었는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 말해주겠다고 한다. 아날로그 시대에나 통용되는 말일 것이다. 이제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가 말한 대로 구글창을 뒤져보거나 유튜브 목록을 털어보면 한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도 여전히 소설책을 뒤적이는 부류의 사람들끼리 교환하는 음험한 눈빛 혹은 그들만의 소통 방식 또한 사라지지 않을 터. 안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이영도와 유치환을 떠올리거나,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듣거나, 곧 스쳐 지나갈 가을을 즐길 시간이 너무 늦지 않기를.